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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오 Mar 20. 2022

런던으로 이민 간 고려청자 (3)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을 통해 본 우리 도자기의 디아스포라

1. 오브리와 엘리자베스 르 블론드


   오브리 르 블론드(Aubrey Le Blond, 1869-1937)는 영국 노비턴 지역의 상인이었던 프랜시스 오브리의 큰아들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으며,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하여 상당한 인문학적 교양을 지닌 인물이었다. 1900년, 탐험가이자 모험가, 산악인이었던 엘리자베스 호킨스-위셰드(Elizabeth Hawkins-Whitshed, 1860-1934)와 결혼하였고 이들은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방문하였다.


오브리 르 블론드(좌) 엘리자베스 르 블론드(우)


인터넷 상에 'Elizabeth Le Blond' 또는 그의 결혼 전 이름인 'Elizabeth Hawkins-Whitshed' 등을 치면 많은 역사 연구자들이 빅토리아 시기 모험가로서의 그의 이력을 상세히 풀어쓴 글들이 많이 나온다. (하단 링크 참조) 심지어 엘리자베스는 건강 상의 문제로 스위스에 오래 머물면서 산악을 즐겨하였는데, 여성산악회(Ladies' Alpine Club)의 1대 회장직을 맡을 정도로 활동적이며 진취적인 인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오브리와 결혼하기 이미 이전에 두 번의 결혼과 사별을 경험한 바 있다. 일찍이 큰 자산을 상속받고, 전도유망했던 군인이었던 첫 남편과 수학자였던 두 번째 남편을 통해 각기 다른 세상을 경험했던 그는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요구에 순응하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자신의 내면이 소리에 보다 귀 기울이며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리고 1900년, 본인보다 10살이 어린 오브리를 만나 여생을 함께 하게 된다. 이전 남편들과는 1~2년 정도 함께 하다가 멀어지고 이내 사별을 한 반면, 오브리와는 (그 당시) 오지로 여행을 함께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브리 르 블론드가 많은 양의 한국 도자를 수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엘리자베스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오브리가 한국을 방문하고 많은 양의 도자를 수집했던 것은 엘리자베스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좌) 젊은 시절의 엘리자베스 / (우) 본격적으로 전문 산악인이 되어 활동하던 시기의 엘리자베스


현재까지도 엘리자베스가 남긴 많은 사진들은 당대의 자연경관은 물론 사회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자료로서 많이 활용되고 있고, 작가로서 그가 남긴 많은 글들은 역시 19세기 말엽 여성의 사회 활동을 분석하는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사료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1928년에 출간된 엘리자베스의 자서전인 『Day in, Day out』(1928)이라는 책에는 르 블론드 부부가 한국 여행에서 도자를 수집한 경위와 배경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이번 연구에 매우 중점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 해당 도서가 없고 절판된 지 오래된 희귀 서적이므로 아직까지 국내에서 연구된 바가 없어서 직접 내가 고문헌을 찾아 나서야 했다. 나는 영국에 머무는 동안 별도의 신청을 통해 영국 도서관(British Library)에서 해당 자료를 접할 수 있었고, 많은 내용은 아니지만 간략하게나마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는 르 블론드 부부의 수집 활동 경위와 과정 등의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지 않은 르 블론드 부부가 수집한 한국 도자 컬렉션의 구체적인 작품 유형과 수량, 박물관으로의 위탁 과정 등은 앞선 글에서 설명했던 V&A 아카이브 기록물의 내용에서 확인하였다.




2. 자서전을 통해 본 수집 양상


   엘리자베스는 자서전에 오브리와 자신이 한국 도자 수집에 관심을 두게 된 배경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1912년부터 약 1년 동안 중국, 일본, 한국 등의 극동 지방을 여행하기 이전까지 남편 오브리는 중국 및 한국 도자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소설가이자 고고학자였던 그의 친구 에드워드 벤슨(Edward F. Benson, 1867-1940)의 영향으로 영국 샐럽(Salop; 또는 Shropshire) 지역에서 중국 청화백자를 모방하여 생산하였던 샐로피안(Salopian) 자기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었다. 실제로 오브리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다량의 ‘채색 샐로피안 도자기’ 목록을 V&A에 제안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이 아카이브 기록물에 드러나 있어 이를 통해 자서전의 내용을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다.


* 샐로피안 자기는 영국 슈롭셔 지역의 코플리 자기 공장에서 제작된 것으로 흔히 코플리 자기라고도 불린다. (아래 사진에서 보다시피, 중국 건축물의 요소를 그려 넣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곤 했다.)


Caughley Porcelain Factory (1772-1799) ⒸBritish Museum (Item number: 1981,0101.337)


엘리자베스에 따르면, 이들 부부의 동양 도자에 관한 관심은 1913년 홍콩에서 세이스 박사(Professor Archibald Henry Sayce, 1845-1933)를 만나면서 생겼다고 한다. 세이스 교수와 르 블론드 부부는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중국의 옛 도자를 수집하였고, 그 과정에서 점차 한국 도자에 더 큰 흥미를 갖게 된 것이다.


세이스 박사는 옥스퍼드에서 언어학과 아시리아의 고고학, 역사, 언어학 등을 가르친 교수였다. 1923년 출간된 그의 자서전 『Reminiscences』(1923)에는 그가 중국으로 가던 길 오브리와 엘리자베스 르 블론드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좌) Professor Archibald H. Sayce ©Griffith Institute Archive / (우) 세이스 박사의 자서전 중 르 블론드 부부를 언급한 부분


엘리자베스의 글에 따르면, 일찍부터 한국, 중국, 일본을 모두 여행하며 각 지역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세이스 박사는 이들 부부에게 미국인과 유럽인들 사이에서 고려청자가 경쟁적으로 수집되고 있음을 알려주었고 아직은 “합리적인 값”에 사들일 수 있다고 조언하면서 앞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을 암시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르 블론드 부부는 계획에 없던 한국 여행을 일정에 추가하였고 예정된 것보다 오래 한국에 머무르며 본격적으로 한국 도자를 수집하였다.


르 블론드 부부는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한 조선인 거래 상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영어에 매우 능통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이들 부부를 도와 서울, 부산 등 각지에서 원활하게 한국 도자를 수집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때의 수집 활동을 계기로 자신들이 유럽 내에서 거의 최초로 가장 많은 한국 도자 컬렉션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신송과 그의 상점 광고문 (출처: 홍지혜 선생님의 박사논문)

* 위 사진 자료는 Ji Hye Hong 선생님의 박사 논문 『Collecting Korean Things: Actors in the Formation of Korean Collections in Britain (1876-1961)』의 100쪽에 삽입된 자료이다. 1920년대 외국인을 상대로 가이드, 고미술 판매상 등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 이보다 더 이른 191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했다면 르 블론드 부부가 만난 '서울의 인물'로 그가 가장 유력하다! ㅇvㅇ


르 블론드 부부가 한국에서 도자를 수집하기 시작했던 1912년은 조선총독부에서 무덤 도굴을 금지한 직후의 시기였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글에서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지적하며 “한국 내에서 옛 도자기를 취하는 방법은 위험을 무릅쓰고 무덤에서 직접 발굴하거나 일제강점기 이후 권력을 잃게 된 과거 고위직 관리들이 소유했던 골동품을 사들이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라고 설명한다.


당시 총독부의 무덤 도굴 제한으로 인해 도굴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이 때문에 좋은 옛 도자를 구하기란 어려웠고, 운 좋게 도굴에 성공한 거래상은 총독부의 감시를 피하고자 도굴한 유물들을 재빨리 적당한 가격에 팔아넘기고자 했다는 당시의 상황을 엘리자베스는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또한 르 블론드 부부는 옛 도자를 수집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지방까지 내려가는 수고를 감내했으며, 돈을 벌기 위해 무덤을 파헤친 농민을 만나 도굴된 옛 도자들을 구매할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이때 도굴꾼이 무덤에서 꺼낸 유물들을 바닥에 펼쳐놓고 자신과 남편이 고를 수 있게 해 주었다고 생생하게 설명하며 이들 부부가 한국 도자를 수집한 방법과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무분별하게 고분이 도굴되던 구한말의 세태와 어떻게 청자와 백자가 외국인 수집가의 소유가 되었는지 현장감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서양인 여행객이 한국에서 현지인을 통해 유물을 사들이는 모습은 20세기 초 르 블론드 부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17년부터 한국에 거주한 메리 린리 테일러(Mary Linley Taylor)의 자서전 『호박 목걸이(The Chain of Amber)』에는 한국에서 광산 사업이 시작되면서 “외국인들이 깨진 그릇이나 도자기를 보면 담배를 주거나 심지어 돈까지 주면서 바꾸자고 안달하는 것을 알게 된 한국인 광부들이 직접 그런 물건들을 발굴”하고 판매했던 당시의 정황에 관해 밝히고 있다.


1909년 영국 잡지 그래픽지에 실린 삽화의 좌측 중간에는 조선 사람들 틈에서 도자기를 살펴보는 외국인 부부가 등장한다. ⒸThe Graphic (1909)


실제로 1909년 12월 4일 영국의 주간지 『더 그래픽(The Graphic)』에 소개된 한국 관련 삽화의 중앙 좌측에는 서양인의 복장을 한 남녀가 한국인들에 둘러싸여 백색 도자기로 추정되는 기물을 손에 들고 바라보고 있다(위). 이는 르 블론드 부부가 한국을 방문했던 시기인 1912년보다 3년이 앞선 시기에 발행된 삽화로, 이를 그린 화가의 경우 이보다 이른 시기에 해당 광경을 목격하고 그림으로 남겨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르 블론드 부부처럼 한국 현지에서 도자 및 각종 유물에 관한 관심을 보인 서양인의 존재를 이미 한국 현지 상인들과 도굴꾼들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상황 덕분에 르 블론드 부부 역시 수월하게 한국 도자를 구매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 아카이브를 통해 본 수집 대상


   르 블론드 부부가 수집한 한국 도자의 유형은 그들이 “한국 여행 중 수집”하여 V&A에 1918년에 ‘기증’한 145점의 한국 도자 목록과 1937년에 ‘판매’한 한국 도자 목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르 블론드 부부는 영국으로 돌아온 직후인 1914년에 V&A를 방문하여 자신들이 한국에서 수집해 온 한국 도자 컬렉션을 박물관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대여(loan)하고 전시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아래).


전시를 위해 작성한 작품 대여 계약서이다. 지렁이 필기체가 인상 깊다. / V&A Registry 자료 (직접 촬영)


전시를 시작하고 1년 후인 1915년, 르 블론드 부부는 자신들의 컬렉션을 주제로 한 한국 도자 도록을 제작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고 도록이 제작되면 해당 컬렉션을 박물관에 기증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 시기 도자 부서의 큐레이터였던 랙햄은 3년 동안 연구와 집필 활동을 거친 끝에 1918년 『르 블론드 한국 도자 소장품 전시도록』을 발간하였고, 그 결과 기존에 대여 전시 중이었던 143점과 새로운 2점을 추가한 145점이 기증의 형태로 V&A의 소장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1918년 박물관에 기증된 도자 목록은 1919년 1월 8일에 공식 문서로 기록되었는데, 여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공습의 위협으로 르 블론드 부부가 런던의 거주지를 떠나기 위해 귀중한 작품들을 박물관에 위탁하고자 한다고 적혀있다. 이는 유럽으로 운반된 한국 도자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사회 속에서 어떻게 유지되고 보존될 수 있었는지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의미한 기록이다.


해당 목록에는 작품의 명칭이 적혀있기보다는 작품의 특징을 문장의 형태로 서술하고 있으며 현재와 동일한 박물관 소장 번호(museum object registration number)를 병기하여 오늘날 컬렉션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와 직접적으로 대조하여 어떤 작품을 묘사하고 있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Registered No.'라고 되어 있는 부분에는 실제 구매로 이어진 작품에 한해 박물관 등록 번호가 적혀 있다. / V&A Registry 자료 (직접 촬영)


목록에 나열된 145개의 도자 중 첫 번째로 작성된 작품은 “Vase, six-lobed, undecorated. (C.486-1918)”이다. 이는 <도기참외형매병>으로 고려 13세기 전반 작품이다. ‘병(vase)’, ‘6개의 잎(six-lobed)’으로 묘사하여 특징을 잘 포착하였으나, 크기, 재질, 입(口緣部)의 특징 등 구체적으로 작품을 설명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아래 좌측).


(좌) <도기참외형매병>(C.486-1918), 고려 13세기 전반 / (우) <청자상감연판문호>(C.590-1918), 조선 15세기 전반


해당 목록의 9번 작품은 “Bowl, cone-shaped, with slightly rounded sides, small foot-ring. Glaze much crackled, the veins being stained to a reddish hue. Horizontal incised line inside. Base unglazed. (C. 494-1918)”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굽(“foot-ring”)을 표현한 점과 굽의 내면이 유약처리가 되지 않은 점(“base unglazed”)까지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현재 경덕진(Jingdezhen, 景德鎭)에서 생산된 백자로 판명되었으나, 당시에는 한국 도자기로 오인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및 한국 도자에 대한 명확한 구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접시(C.495-1918), 주자(C.528-1918) 등 중국 도자가 다수 섞여있다. 필자가 연구를 위해 145점 모두를 현재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와 대조해 본 결과, 94점만이 한국 도자였으며 검색 결과가 나오지 않는 1점을 제외하고 나머지 50개의 도자는 모두 중국 경덕진, 복건(Fujian, 福建), 허베이(Hebei, 河北)에서 제작된 것들이었다.


* C.000-XXXX로 적혀 있는 유물 번호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C는 Ceramics의 약자로 도자부서에서 구입한 유물을 뜻한다. Circulation은 CIRC, Metal은 M, Textiles는 T 등으로 표기된다. 중간의 000의 경우, 입고된 순서 즉, 순번으로 이해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XXXX 네 자리는 입고된 년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르 블론드 부부의 도자 유물 기증/판매는 C.000-1918 등으로 표기된다.


유물 번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아래의 V&A 온라인 컬렉션 데이터베이스에서 작품 번호를 기준으로 검색하면 사진과 함께 작품의 정보를 찾아볼 수 있다.


https://www.vam.ac.uk/collections?type=featured


한국 도자의 경우, 고려청자 및 조선 15세기 전반에 제작된 청자인 <청자상감연판문호>(C.590-1918)와 17세기 백자 명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위 우측). 이와 같은 한국 도자 컬렉션을 바탕으로 앞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는 최초의 한국 도자 도록이 제작되었는데, 아카이브의 작품 목록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중국 도자가 혼재되어 있어 당시 한국 및 중국 도자에 대한 학술적 정보가 많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8년이 지난 1937년 5월 26일에 르 블론드 부부는 개인 소장 중이었던 나머지 22점의 자기류(porcelain)를 V&A에 판매하였다. 당시 작성된 목록을 보면, 호(jar) 5건, 병(bottle) 7건, 주자(wine pot) 2건, 잔(water pot) 1건, 그릇(bowl)이라 표기된 잔대 1건(C.96-1937), 접시(tray) 1건, 지석(memorial tablet) 1건, 연적(water pot) 3건, 필통(brush pot) 1건으로 종류가 다양했다.


1937년 판매한 르 블론드 부부의 한국 도자 목록 / ⒸV&A Museum


특히 <백자청화동화모란문호>(C.81-1937), <백자청화운룡문대호>(C.83-1937), <백자청화기린호문호>(C.84-1937)과 같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청화백자대호가 포함되어 있어 접하기 쉽고 운반이 용이한 작은 문방구와 같은 일상 용기 외에도 운룡문대호와 같은 큰 도자도 반출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르 블론드 부부가 수집한 한국 도자는 고분에서 도굴된 도자 외에도 20세기 당시에 제작된 <흑갈유주자>(C.89-1937)도 포함되어 있었다(아래).


<흑갈유주자>, 20세기 초 조선 / ⒸV&A Museum


오브리와 엘리자베스 부부는 3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한국 도자를 수집했음에도 굉장히 다채로운 컬렉션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들 부부가 판매한 22점 모두 18세기 후반에서 이른 20세기에 제작된 조선 시대의 도자기였으며 이는 모두 75 파운드에 책정되었다. 1935년을 기준으로 75 파운드에 해당하는 가치는 소 한 마리를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자, 기술직 노동자(skilled tradesman)가 52일 동안 일 했을 때 벌어들이는 임금과 같은 값으로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때 판매된 22점의 도자는 1937년 V&A의 입수 보고서에서 주요한 유물로 다루어졌을 만큼 1930년대에 이르러서도 박물관 측에서 한국 도자를 확보하는 일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르 블론드 부부를 통해 얻게 된 한국 도자는 과연 당시 어떠한 평가를 받았을까?


다음 장에 계속.




* https://womensmuseumofireland.ie/articles/elizabeth-lizzie-le-blond--2

* https://heritage.wicklowheritage.org/people/our_wicklow_women-2/elizabeth_hawkins-whitshed_of_killincarr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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