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시.
생각이 꼬여 밤 늦도록 헤매다가 새벽에야 발동이 걸려 동 틀 무렵까지 일을 끌어안고 있었다. 탄력받은 김에 더 매달려 달릴 것이냐, 아이들이 깨기 전에 잠시라도 눈을 붙일 것이냐 기로에 섰다.
띠로리로리. 남편의 기상 알람이 울린다. 두 음절만에 알람이 꺼지고 남편은 너무나 개운하게 일어나 굿모닝. 물 한잔을 따라 한 모금은 입을 헹구어 뱉어내고 나머지를 꼴깍꼴깍 원샷한다. 신기하다. 새벽 알람에 쉽게 눈을 뜨는 것도 눈 뜨자마다 물을 마시는 것도.
이른 아침에 마주치면 서로가 참 대단하다는 인사를 건낸다.
어찌 이 시간까지 안자고 일을 하니?
어떻게 이렇게 일찍 일어날 수가 있어?
남편은 한라산이 보이는 창가 앞에 요가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한다. 그 모습을 보니까 나도 괜히 허리를 세우고 팔을 위로 뻗고 있다. 작업중인 파일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아이들의 아침 시중 걱정없이 침대에 누워도 괜찮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편 자리에 반듯하게 누워 허리에 일부러 힘을 주어 바르게 폈다. 연후가 눈을 떴을 때 엄마가 자기 옆에 있지 않아서 심통을 부리겠지만 나도 잠시 편안하게 눕고 싶다. 내 자리에 엉켜있는 아이들 사이를 굳이 비집고 들어가 몸을 구겨 눕고 싶지 않다.
잠시만 허리를 펴려고 누웠는데 남편이 조깅을 다녀오는 소리도 못듣고 몸이 침대로 스르륵 녹아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연후가 깨어 툴툴대는 소리에 단잠이 섰다. 한 자리 건너에 누운 나를 째리고 쏘아댔지만 나는 눈을 더 꼬옥 감았다. 하. 네 엄마 어디 멀리있니.
나 들으라고 발소리를 쿵쿵 내며 거실로 나가 아빠에게 아침으로 프렌치 토스트를 주문하더라. 남편은 냉동 식빵을 해동하는 동안 달걀을 풀고 후라이팬을 달구었다. 찹찹. 지글지글. 탁탁. 착착.
오오 좀 비슷한데.
내가 해주듯이 세모로 잘라 내 주었나보다. 딸아이의 감탄에는 기대가 가득 담겨있다.
에잉. 뭐야. 엄마가 해준 거랑 달라. 엄마한테 다시 해달라고 할래.
그냥 먹어. 엄마 깨우지말고.
남편은 아마 달걀을 풀어칠 때 내가 우유를 살짝 넣는 건 몰랐겠지. 그나저나 몽롱한 채로 이 아침의 소리를 다 듣고 누워 있는 게 너무 평화롭다.
우유 한 잔을 비우지않는 딸 아이와 가벼운 실랑이 하는 소리, 아들 녀석이 아침부터 티비를 보고싶다고 어리광부리는 소리. 낮게 깔린 라디오 클래식 채널의 잔잔한 음악 소리. 열린 창문 밖에서 새들이 떠드는 소리.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딸이 학교에 갔고 아들은 아침부터 치열했던 전쟁놀이를 멈추고 아쉬워하며 유치원에 갔다.
유치원 라이딩을 나간 시간이 아홉시 사십분. 나는 살금 몸을 일으켜 아무도 없는 거실로 나간다. 몇 시간을 잔 건 지 잘 모르겠지만 굿모닝.
남편은 늘 일어나면 물 한잔을 마시라고 당부하지만 왠지 입이 써서 맹물은 잘 안 넘어간다. 대신 나는 더 쓰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지. 이 맛이다.
애들은 다 컸는데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다는 건, 외조휴직 아니면 그냥 쉬는 것이어야 한다.
남편은 둘 다를 이유로 휴직을 결정했다. 사업구상 이런 이유는 아니길 바라며 나는 그 결정을 허락했다. 사실 허락의 문제는 아니고 제주이사를 결심한 일년 전부터 상의해 왔다. 휴직의 시기를 지금으로 정한 것을 들어준 것이다.
직장인에게는 왜 안식년이 없는지. 십수년을 한 직장에서 일 하고, 일 년을 꼬박 주말마다 서울 제주를 오고가느라 애쓴 남편이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었다.
아침 운동을 하고 아이들 등교를 돕는 일이 남편의 휴직 일과에 계획되어 있었을까.
어찌되었든 나는 지금 좋다. 잠시 멍 때릴 시간도 생기고 말이다. 아이들은 아빠가 바로 옆에 있어도 꼭 멀리 있는 엄마를 불러 과자 까달라, 꽉 끼인 블록을 빼달라 하지만 차차 나아지겠지. 머리는 엄마가 묶어줘야하고 아이들 돌아오면 뚝딱 간식을 내어주는 센스는 없어도 좋다.
남편의 휴직이 사소하고 티도 안나게 바쁜 엄마의 일상에 조각조각을 다 채우진 못해도 결정적인 순간 확 트이는 든든함이 있다. 마치 테트리스의 긴 블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