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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고독함

누구나 고독한 순간이 온다.

by 닥터브룩스
"개인일 수 있는 이유가 읽기라는 행위에 있다고 봅니다. 읽는 순간에 인간은 고독해지거든요. 인간은 글을 읽으며 생각을 하잖아요. 생각은 대부분 혼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깊이 있게 골똘히 생각할 때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조차도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물러나 혼자 있게 됩니다."

-유튜브는 책을 삼킬 것인가, 김성우x엄기호 지음




우리는 흔히 '집단지성'이라는 말을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하곤 한다. 복잡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말하며 회의실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자리에서 과연 우리가 기대했던 빛나는 지성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가? 오히려 서로의 눈치만 살피다 공허한 목소리의 나열로 끝나거나,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의 의견으로 어정쩡하게 봉합되는 경험을 더 자주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어쩌면 집단지성이라는 개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집단'이라는 행위에 몰두한 나머지, '지성'이 과연 어디에서 발원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잊고 있다.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 입력된 글에서 정의하듯, 그것은 다수의 사람이 하나의 주제를 놓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의견'이고, 그 의견은 '생각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그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결코 회의실 테이블에서 즉흥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진정한 생각, 즉 날카롭고 깊이 있는 사유는 철저히 고독한 시간 속에서, 개인의 내면에서 싹튼다. 우리는 집단지성을 말하기 전에, 그 지성의 재료가 되는 '개인의 사색'에 주목해야 한다. 생각은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내면 위주의 것이다. 그것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철저히 혼자만이 가질 수 있는 독점적인 '것'"이다. 이 독점적인 사유의 시간을 보장하지 않고서는 어떤 가치 있는 의견도 나올 수 없다. 생각에 관한 한, 이 '철저한 개인주의'는 이기심이 아니라, 집단에 기여하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준비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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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독한 내면의 생각은 '출시되지 않은 제품'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집단과 개인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첫째, 내면에 머무는 생각이든 출시되지 않은 제품이든, 그것은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롭다.' 이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내면의 작업실에서 사상가는 세상의 비웃음이나 반대에 대한 두려움 없이 가장 급진적이고 기이한 아이디어를 탐험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논리의 비약도, 현실과의 괴리도 허용된다. 바로 이 자유로움 속에서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움이 잉태된다. 만약 생각이 싹트는 순간부터 타인의 평가를 의식해야 한다면, 그 생각은 결코 대담해질 수 없으며, 결국 '평균적인'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둘째, 이 내면의 생각은 그것이 밖으로 표현될 때 '구체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훌륭한 생각도 내 머릿속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출시되지 않은 제품의 시제품 스케치와 다를 바 없다. 아무런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그것이 집단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입 밖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모호한 '생각'이 아니라, 논리와 근거를 갖춘 '의견' 또는 '제품'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구체적인 설명, 즉 정교한 언어와 논리적 구성이 요구된다. 내가 고독 속에서 발견한 보물을 타인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하고 '설명'하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 설명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생각은 그저 독백으로 남을 뿐, 집단지성의 재료가 될 자격을 얻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꿀벌 군집의 의사결정 방식은 이 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새로운 집터를 찾아야 할 때, 수백 마리의 정찰벌이 각자 흩어져 '혼자만의' 탐색 비행을 떠난다. 이것이 바로 '고독한 내면의 생각' 단계이다. 정찰벌은 홀로 위험을 무릅쓰고 수 킬로미터를 날아가 잠재적인 집터를 탐색하고 평가한다. 이것은 철저히 '독점적인 것'이다. 탐색을 마친 정찰벌은 군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생각의 결과'를 '입 밖으로' 낸다. 바로 '8자 춤(Waggle Dance)'이라는 정교한 언어를 통해서다. 이 춤은 "나는 좋은 곳을 찾았어"라는 모호한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집터의 방향, 거리, 심지어 품질(꿀의 양)까지 정확한 정보로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출시된 제품'이다. 다른 벌들은 이 춤(의견)을 보고 '평가'하며, 일부는 직접 날아가 검증(교차 검증)하기도 한다. 가장 설득력 있는 춤(논리적이고 설득적인 의견)이 다수의 공감을 얻으면, 마침내 군집 전체가 그곳으로 이동하는 '집단지성'이 발현된다. 만약 정찰벌이 고독한 탐색을 게을리하거나, 춤을 대충 추어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했다면 군집 전체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 집단의 생존은 개인이 고독 속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사색하고, 그것을 얼마나 정교하게 표현하는가에 달려있다.


이러한 원리는 인류의 위대한 기술적 성취에서도 발견된다. 리눅스(Linux) 운영체제의 개발 과정은 현대판 집단지성의 교과서로 불린다. 하지만 그 시작은 리누스 토르발스라는 한 개인의 '고독한 내면의 생각'이었다. 그는 1991년, 자신이 만든 커널의 0.01 버전을 '출시되지 않은 제품'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이 제품을 '입 밖으로' 내놓자, 전 세계의 수많은 개발자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단순한 잡담이나 아이디어의 나열이 아니었다. 개발자들은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들여 리눅스 커널의 특정 부분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찾고, 개선할 수 있는 코드(patch)를 작성했다. 이 코드 조각이 바로 그들의 '사색의 결과물'이자 '출시된 제품'이다. 이 제품은 "구체적인 설명"을 동반하여 커뮤니티에 제출된다. 그러면 이제 '타인의 평가'가 시작된다. 이 코드가 과연 전체 시스템과 '조화'를 이루는가? '논리적이고 설득적'인가, 아니면 다른 부분을 망가뜨리는 '고집스럽고 이기주의적인' 코드인가? 오직 이 엄격한 평가와 조화의 과정을 통과한 개인의 사색만이 리눅스라는 거대한 집단지성의 일부가 될 자격을 얻는다.


여기서 우리는 내면의 생각과 외면의 표현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긴장을 발견한다. 입력된 글의 통찰처럼, "입 밖으로 나온 생각은 더 이상 생각이 아니다." 내면에 있을 때 생각은 자유롭고 무한한 '다양함'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외면'으로 나오는 순간, 즉 대화의 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것은 '조화'라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지점에서 개인의 사색은 두 갈래 길에 선다. 하나는 타인의 생각과 연결되어 더 큰 지성으로 나아가는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길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만의 주장에 갇혀 고립되는 '고집스럽고 이기주의적인' 길이다. 내면의 자유로움이 '방종'이 되지 않고 외면의 조화가 '맹종'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성숙한 지성이 마주한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표현된 의견이나 출시된 제품은 다음에 나올 생각이나 차기 출시 제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꿀벌의 춤은 다른 꿀벌의 검증 비행을 유도하고, 리눅스에 추가된 코드는 다음 버전의 기반이 된다. 한번 세상에 나온 생각은 그 자체로 '환경'이 된다. 그것은 타인의 사색을 자극하는 재료가 되며, 다음 단계의 논의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나의 '출시된 제품'이 다음 세대의 '내면의 사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일에 더욱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우리는 집단지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수정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집단'이라는 형식에만 매달려왔다. 사람들을 모으고, 플랫폼을 만들고, 소통을 강요했다. 하지만 정작 그 집단에 기여할 '지성'을 가진 개인을 키우는 데는 소홀했다. 진정한 집단지성은 역설적으로, '개인의 고독'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가 진정 뛰어난 집단적 성과를 원한다면, 시끄러운 회의실을 만들기 전에, 각자가 자신의 '출시되지 않은 제품'을 치열하게 빚어낼 수 있는 '고독한 내면의 작업실'을 먼저 보장해야 한다.


우리의 조직과 사회는 과연 구성원들에게 이 '생각의 독차지'를 허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끊임없는 소통과 협업이라는 명목하에, 아직 무르익지 않은 생각들을 섣불리 평가의 장으로 끌어내어 그 잠재력을 질식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집단에 기여하는 가장 위대한 방법은,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이 생각한 후에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집단을 위해 얼마나 깊은 고독 속에서 당신만의 '제품'을 빚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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