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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한산책방

거만한 바보에서 탈출하기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유시민/돌베개/2024

by 한산

"그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믿는 거만한 바보였다." - 파인만


평소 뜬구름 잡는 말을 많이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문과 출신인 내가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칠 때 보면 감성적인 면이 부각되는 걸 느낄 때가 많다. 과학적 사실을 도덕적이거나 인문학적으로 풀어서 해결한다. 예를 들면 물의 상태변화 이야기할 때 "액체, 고체, 기체"의 상태를 수업시간(고체), 쉬는 시간(액체), 점심시간(기체)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비유해서 표현한다. 그럼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지만 이게 과학적 설명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어쩌면 유년시절 이런 설명을 초등학교 때 누군가에게 들었던 기억이 남아 똑같이 내리 전승되어 오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아직 구체적 조작기에서 형식적 조작기로 넘어가는 단계라 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MBTI에서 T와 F사이 먼 감정선처럼 문과와 이과의 사고방식은 다르다. 공대생과 국문학도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정말 다를 것이다. 두 번째 읽다가 이 브런치를 들어왔지만 여전히 이과적 상식은 어렵다. 나는 무엇인가-뇌과학,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생물학, 단순한 것으로 복잡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화학,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물리학, 우주의 언어인가, 천재즐의 놀이인가-수학까지 여전히 난해하다. 문과생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단 파인만 자서전과 코스모스, 이기적 유전자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책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우리 집에 대한 진실을 말했고, 다윈은 엄마를 '생얼'그대로 보게 했다. 집과 엄마에 대한 생각이 바뀌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달리 보게 되었다."p.36

어느 과학적인 설명보다 위와 같이 일상생활과 비유한 문장과 측은지심-맹자는 사람한테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함께 느끼면서 남을 도우려 하는 생물학적 본성이 있다고 했다. 이걸 작가는 거울신경세포와 연결 지었다. 같은 맹자 말이 크게 와닿았다. 여전히 뼛속까지 문과다라는 걸 알게 되었고, 한 번 문과는 영원한 문과가 될 경향이 크다는 걸 생각해 봤다. 단 세상을 보는 폭이 넓어졌다는 것과 나 자신이 너무 좁게 인문학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걸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처럼 예전보다는 훨씬 많은 것을 더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며 거만한 바보가 아닌 고집스러운 문과생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와 진실을 판단하는데 조금 겸손한 사람이 될 것 같다. 거만한 바보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이 책에서 김광규 시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시를 발견했다.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는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꼬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과학공부를 위한 책에서 이 시를 발견하는 대단한 문과생이다. 별똥별에서 중식이 나는 반딧불이라는 노래를 떠올리고, 중년 나이라서일까 부끄럽지 않는가라는 성찰의 소리도 바람의 속삭임처럼 귓전으로 흘리며라는 시구에서 뭉클해진다. 현실에 매진하는 많은 문과생들이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그래도 인문학이지라는 아집이 아니라, 또 여전히 과학은 어려우니 포기해야겠다가 아닌 "난 부럽지가 않아", "자유의지"가 있어 과학도 알아가며 다양하게 세상을 바라봐야지 하는 참 문과생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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