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 소나무 아래 (30년 전 열두 살의 내가 본 것)
아버지 장례식장의 형광등은 유난히 밝았다.
조문객들이 빠져나가고, 나는 영정 사진 앞에 앉아 있었다. 투병 3년. 아버지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다.
슬프지 않았다. 아니 슬픔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오랜 전부터 연습해 온 이벤트를 마침내 치르는 것 같았다.
문상록을 넘겨봤다. 150명. 회사 사람들, 친척들, 오래된 친구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버지가 진짜 마음을 나눴던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아버지는 외로웠을까? 150명에 둘러싸였어도?
벽에 걸린 tv에서 저녁 뉴스가 흘러나왔다.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자막이 보였다.
"무연고 사망자 증가... 작년 4200명"
나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무연고. 연고가 없다는 뜻.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들.
화면이 바뀌었다. 야산 어딘가. 경찰 차단선. 나무들
앵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50대 남성으로 추정되며, 발견 당시 이미..."
나는 화면 속 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나무들.
소나무였다.
순간, 나는 숨이 멎었다.
시뻘건 흙바닥. 소나무. 빨간 티셔츠를 입은 남자. 그리고 튀어나온, 보랏빛이 되어버린 혓바닥.
30년 만에 그 얼굴이 돌아왔다.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그날 아침, 학교는 평상시와는 달랐다.
경찰복을 입은 낯선 사람들이 있었고, 선생님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아이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발동된 나의 호기심은 나를 한 무리의 아이들을 따라 산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내 삶의 큰 사건 하나를 경험하게 되었다. 내 나이 열두 살 아직 초등학교를 마치기 전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뒤쪽으로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비만 오면, 무너져 내려 나무뿌리까지 드러내던 붉은 흙더미는 방과 후나 휴일이면 맨발로도 놀 수 있는 최고의 놀이터였다. 게다가,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빨간 엉겅퀴 모양의 산딸기와 어른 팔뚝만 한 칡 덩이로 우리들에게 간식거리를 제공하고는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침 조회를 마친 반장은 검은색 출석부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 복도를 걷고 있었다. 1교시 시작 전이었다. 나는 복도로 나와 화장실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소리쳤다.
"사람이 죽었데"
그 소리와 함께 복도는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었다.
"구경 가자"
서너 명의 아이들이 앞장서서 복도를 벗어나 계단으로 향했다.
그 충격적인 소식은 당시 내가 읽고 있던 아가사 크리스티와 셜록 홈스의 살인 사건들을 떠올리게 했다.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나를 자극했고, 나도 모르게 한 무리의 아이들을 따라 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평생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야트막한 동산을 올라 울창한 나무를 따라 걷다 보면 고요한 평지가 나타났다. 그곳에 자리 잡은 몇몇의 커다란 소나무는 몇십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듯 견고해 보였다.
경찰제복을 입은 사람이 보였고, 몇몇 사람이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돌려 왼쪽을 바라보았다.
왼쪽 소나무 아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 낡은 청바지에 빨간 티셔츠가 그의 체형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도 구경 나온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나는 다시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
밀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했다.
그리고 입 근처에... 무언가 튀어나와 있었다.
빨간색.
아니.
시간이 지나 보랏빛이 되어버린.
혓바닥.
그제야 보였다. 목에 감긴 노끈. 나무와 연결된 그의 몸
그는 서 있는 게 아니었다. 매달려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 남자와 눈을 마주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금 그의 눈을 보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도망쳐야 했다. 지금 당장.
나는 뛰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빠르게.
숨이 찰 겨를도 없이.
아이들의 얼굴도 보지 않고.
그저 뛰었다.
어떻게 산을 내려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혼자 있고 싶었지만, 혼자 있는 것은 더 무서웠다. 교실로 돌아왔을 때, 내 심장은 여전히 터질 듯 뛰고 있었다.
함께 했던 아이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듬성듬성 빈자리가 보였다. 1교시 수업은 이미 시작되었고, 나는 아무 생각 할 여유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이 다가왔다. "양호실에 가보렴." 그리고는 이내 칠판으로 얼굴을 돌리셨다.
수업이 끝났다.
"쓸데없는 데 돌아다니면서 수업이나 빼먹고... 하면 안 된다!"
선생님은 짧게 한마디를 남기고 교실을 나가셨다.
창피한 마음도, 아이들의 주목도 나에게는 큰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나는 아무런 말 없이 책상에 엎드렸다.
무섭고, 기괴한 그 현장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그 남자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 모습을 머리에서 지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지운 게 아니었다. 묻은 것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밤마다 그 모습이 떠올랐다. 눈을 감으면 그가 나타났다. 하얀 얼굴, 보랏빛 혀.
친구들과 싸우거나 엄마에게 혼난 날은 더 심했다. 밤에 그가 나를 찾아올 것 같았다. 그 소나무로 끌려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침이 오면 그런 두려움은 사라졌다. 오늘 도시락에 엄마가 무슨 반찬을 싸 줄까. 친구들이랑 뭐 하고 놀까, 그런 생각들로 채워졌다.
나는 생각보다 강했다. 아니, 아이는 원래 그런 것이었다. 살아야 하니까 살았다.
더 큰일들이 생기고, 공부하고, 친구 사귀고, 그렇게 바쁘게 살다 보니 그 기억은 점점 깊이 묻혔다.
만약 그 사건이 내 약한 마음에 자리 잡고 나를 계속 괴롭혔다면, 그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지 끔찍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사건은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 죽음을 너무 빨리 알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후 나는 사람의 죽음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건 죽음이라기 보단 오랜 투병 끝에 찾아온 '마지막 인사' 같았다.
한 동안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충격 이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빠져 들었고, 가끔 누군가의 죽음이 방송을 타면 줌 아웃된 카메라처럼 흐릿하게 그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어린아이지만, 어른스럽게 살고 싶었던 나에게 세상은 배울 것도 공부할 것도 너무 많은 곳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와 셜록 홈스, 루팡까지. 세상의 죽음을 목격하며 그 스토리를 파헤쳐 가는 그 멋진 탐정들의 삶에 나를 대입시키며, 마치 내가 세상의 모든 죽음의 해결사가 된 것처럼 몰입했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나는 세속적인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죽음이 갑자기 떠 올랐다.
다음주 화요일 오전 10시에 2화가 공개됩니다.
당신의 첫 번째 죽음의 경험은 언제였나요?
댓글로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무연고#현대인의 고독#연재소설#트라우마#치유#외로움#죽음#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