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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연 고(無緣故)

3화 : 함께 외로운 우리

by 운채


9.

그 평지는 여전히 있었다. 소나무도.

하지만 이제는 잡풀이 우거져 있었다. 30년의 시간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 왼쪽 소나무 아래에 섰다.

30년 전 그날, 나는 이 자리에서 도망쳤다.

죽음이 무서워서. 아니, 정확히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무서워서.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그는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그는 삶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도 안다.

나도 지금 견디고 있다. 간신히.

나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그 남자를 위해 울었다.


"당신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바람이 소나무 사이로 불어왔다.


"당신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텐데. 누군가의 친구였을 텐데."

눈물이 흘렀다.


"미안해요. 30년 동안...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않아서."

나는 가져온 국화 한 송이를 꺼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이제, 하늘나라로 가세요."

"그리고 저도... 살아갈게요."

"당신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기억하기 위해서.“



10.

산을 내려오며, 깨달았다.

무연고는 그 남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무연고자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어깨를 맞대고 있지만 서로를 모르는 우리.

SNS에서 487명과 연결되어 있지만 진짜로는 혼자인 우리.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직장이 있지만 그럼에도 외로운 우리.

연결되어 있는 듯하지만 각자의 세계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우리.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것이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우리 모두 그렇구나.

이 고독은 나의 실패가 아니었다. 이것은 현대를 사는 조건이었다.



11.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30년 동안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글로 썼다.


완전히. 정직하게.

뒷산의 남자에 대해.

빨간 티셔츠와 보랏빛 혓바닥에 대해.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에 대해.

그리고 30년 후, 내가 그에게로 돌아간 이야기에 대해.

글을 쓰며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외롭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혼자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기억하는 거다. 서로를 기억하는 거.

그리고 이야기하는 거. 나도 외롭다고. 너도 외롭다고.

이 고독을 나누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완전히 혼자가 아니게 된다.



12.

다음 날 출근길.

2호선 아침 8시. 여전히 300명이 한 칸에 밀려 들어온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내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봤다. 피곤해 보였다. 눈 밑에 다크서클. 손에 든 핸드폰.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는 모습.

그녀도 힘들 것이다. 그녀도 외로울 것이다. 그녀도 견디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함께 외롭다.

그리고 그것으로 괜찮다.



13.

이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깨달았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 쓰기 시작했다.

그 두려움을 내려놓기 위해. 나도 무연고가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마주하기 위해.

하지만 쓰다 보니 알았다.

이것은 내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어깨를 맞대고 있지만 서로를 모르는 우리.

SNS에서 487명과 연결되어 있지만 진짜로는 혼자인 우리.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직장이 있지만 그럼에도 외로운 우리.

우리는 모두 잠재적 무연고자다.

하지만 이것을 알게 되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우리 모두 그렇구나.

그리고 이 고독을 나누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완전히 혼자가 아니다.



14.

30년 전, 뒷산에서 죽은 그 남자.

그는 무연고였다. 법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그를 기억한다.

그리고 당신이 이 이야기를 읽는다면, 당신도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무연고가 아니다.

빨간 티셔츠를 입은 마른 남자. 시뻘건 흙바닥 위, 소나무 아래. 보라빛 혓바닥.

그리고 그 뒤에 있었을 깊이를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

나는 그를 기억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기억한다.

487명의 친구 목록 속에서 혼자였던 나를.

가족이 있지만 외로웠던 나를.

삶의 무게를 견디려 애쓰는 나를.


우리는 모두 무연고였다.

하지만 이제,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연결된다.





에필로그

오늘도 나는 출근한다.

2호선 아침 8시. 300명이 한 칸에 밀려 들어온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모두는 각자의 무게를 지고 있다는 것을.

각자의 외로움을 견디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함께 외롭다는 것을.

때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살아가기에.

견디기에.

기억하기에.


"30년 전 그날, 소나무 아래.

당신은 혼자 죽었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기억합니다.

우리 모두를 기억합니다.

무연고였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로 연결되었으니까."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지만 고립되어 있으며,이 역설적 고독을 인정하고 나눌 때, 비로소 진짜 연결이 시작되고, 무연고는 끝난다."


저자 후기

이이야기는 실제 경험에 기반하지만, 허구입니다.

진실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사실을 바꾸었습니다.

그 남자는 실재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30년 후 그 산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하지만 이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으로도 돌아갔습니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읽으며 당신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외롭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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