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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일사삼공삼 Apr 09. 2021

검역 그리고 검역

봄이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봄을 싫어할 수가 없지! 올리브색을 반쯤 섞은 듯한 옅은 초록빛이 감도는 나무와, 화려하게 피었다가 아쉽게 뚝뚝 떨어지는 벚꽃, 겨울을 참다 결국 샛노란 고함을 지르는 개나리 같은 것들. 발목 아래에 소복하게 피어나는 보랏빛 제비꽃을 보면 당장 우리 집 정원으로 납치해 오고 싶지만, 야생 제비꽃을 캐 와서 화분에다 심으면 그 결말은 항상 죽음으로 끝났다. 감히 너 따위가 날 길들일 수는 없다는 거겠지.

꽃다발을 선물하는 것은 꽃뿐만이 아니라 꽃다발을 든 그 사람을 바라보는 부러움의 눈길까지 선물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시선은 좋아하지만, 절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활짝 피어난 아름다운 꽃은 마음과 함께 건네받은 그 순간부터 급속히 시들어버린다. 화병에 꽂은 꽃을 잘 관리하지 못한 내 탓도 있을 테지만, 그토록 생명력으로 가득하고 팽팽하던 것이 볼품없이 쳐지고 그 색을 잃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게는 고문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내게 꽃을 선물해 주고 싶거든, 꼭 뿌리가 있는 화분으로 달라고 당부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이젠 아무 의미 없지만.

그럼 뿌리가 있는 애들은 어디에서 데려와야 하는데? 놀랍게도 인터넷에서 살 수 있다. 이걸 택배로 보낼 수 있다고? 싶은 나무부터 숙근식물까지 전부. 씨앗도 팔고, 모종도 판다. ‘크리핑 로즈마리’, 음, 장바구니로. ‘잉글리쉬 라벤더’? 와, 이건 못 참지. 오, 루꼴라? 펜넬? 이걸 판다고? 클릭, 클릭. 그리고 택배 상자를 열면, 행여 흙 한 톨이라도 흘릴까 싶어 비닐에 꽁꽁 싸진 아이들을 안전하게 그리고 편하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인터넷으로 식물을 사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주로 양재꽃시장에 가서 아이들을 데려오곤 했다. 정원이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오늘은 꼭 구경만 하고 와야지!’ 하고 굳게 다짐했지만, 그래도 꼭 작은 화분 하나 정도를 데려오곤 했다. 그러다 점점 발이 넓어져서, 고양시 꽃 축제까지 가서 화분을 여러 개 사 오기까지 이르렀다.

막 식물을 사 모을 때, 코딱지만 한 기숙사에서 천사 같은 룸메의 마음 씀씀이 덕에 방 안에서 식물을 기르고 있던 나는, 환기가 잘 안 되고 흙이 습할 때 잘 생기는 뿌리 파리라는 벌레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벌레가 많이 자라고 있는 화분을 밖에 내놓는다거나, 룸메의 눈치를 보며 창문을 활짝 열어 두는 등 다양한 방법을 써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결국 종로 쪽에 있는 종묘사에 가서 뿌리파리 전용 벌레약을 사 왔다.

사건의 시작은 고양시 꽃 축제에서 가져온 흰 안개꽃 화분이었다. 새로운 화분도 들였겠다, 약도 샀겠다, 쉬는 날이겠다 싶어 신나게 페트병에다 약을 한가득 만든 다음 화분을 화장실에다 몰아넣고 이파리에, 뿌리에 약을 들이부었다. 이 정도면 최소 피해 최대 효과 아니겠느냐, 격리는 이럴 때 쓰는 거라며 혼자 뿌듯해하면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싶어 화장실에서 화분을 하나하나 다시 방으로 가져오는데, 안개꽃 화분에 뭔가 이상한 게 보였다.

TMI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그때 내가 그 화분에서 발견한 것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설명하면 할수록 단어를 끌어모으는 나도, 읽는 사람도 괴로워질 테니 간단하게 묘사하겠다. 반짝거리는 갈색빛의 둥글고 큰 날개, 하늘로 나동그라지고 싶었으나 흰 안개꽃이 피어난 짙은 초록색의 얇은 이파리를 껴안고 사망한 그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바퀴벌레였다.

어지간한 벌레는 아무렇지 않게 잡을 수 있는 나지만 바선생만은 아니다. 소리를 지르며 화분을 내던지고 싶었지만 여기는 기숙사고, 옆방엔 사람이 자고 있을 수 있고, 던졌다간 뒤처리가 더 험악해질 수 있다는 이성의 마지막 경고를 겨우 수용해서, 화분에 최대한 접촉하지 않으려 애쓰며 내려놓았다. 바로 화장실을 뛰쳐나가 세면대에서 손을 박박 씻고 있자니, 머릿속으로 폭풍이 몰아쳤다.

분명히 한나절 전에 비닐 포트에 담긴 그 아이를 내 손으로 흰 도자기 화분에 옮겨 심었는데. 그땐 없었는데. 흙과 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럼 어디 다른 화분에 있다가 여기서 죽음을 맞이한 건가? 그게 더 소름 끼치는데. 이 친구가 혼자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약을 빨리 뿌려서 다행이다. 약이 바선생을 죽일 정도로 강해서 다행이다. 안 죽고 화장실 배수구 같은 곳으로 도망쳤으면 어쩔 뻔했어. 아, 이걸 룸메한테는 어떻게 말해야 하지. 말하지 말까. 아니 어떻게 이걸 안 말해.

큰 숨을 여러 번 몰아쉬고, 담대해지자, 담대해지자 몇 번이나 자신을 설득한 끝에, 화분을 들고 밖으로 나가 식물도 바선생도 기숙사 뒷마당에 쏟아부었다. 바선생은 사망하기 전에 알을 낳고 죽는다는데, 제발 그러지 않았기를 기도하며. 듬뿍 뿌린 약이 행여나 남아 있는 그분의 다른 동족에게도 편안한 죽음을 선사했기를 기원하며.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안개꽃 화분을 버렸다.

그 이후로 검역 절차를 철저히 지켰다. 새로 산 화분은 반드시 화장실에서 약물 샤워를 시키고, 적어도 24시간 정도는 면밀히 관찰했다. 병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ICU(중환자실) 케어를 했다. 그리고서 문제가 없다는 게 밝혀진 후에, 다른 식물과 함께 식물을 위한 인공조명 아래에 놓일 권리를 부여했다. 직사광선도 아니고 겨우 인공조명 따위에 사람으로 치면 24시간 금식을 요구하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저녁에 되어 룸메가 퇴근했고, 나는 할 말이 있다며 장엄하게 분위기를 잡은 후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불같이 화를 내면서 식물을 다 가져다 버리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건만, 너무나 쿨한 나의 룸메는 ‘그래서 이제 죽었으니까 괜찮은 거 아냐?’ 하고 넘어가 주었다. 천사…천사가 따로 없다. 그 이후로 그녀를 향한 내 애정이 한층 더 상승했다는 건 너무나 뻔하겠지.

얼마 전엔 허브 농장에 가서 루꼴라와 타임, 애플민트를 사 왔다. 잘 키워서 먹을 생각으로 사 온 아이들이라 꼼꼼하게 검역하고 정원에 내놓았다. 씨앗에서부터 키우면 밖에서 원치 않는 벌레가 묻어왔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화장실에서 쫄쫄 굶고 있는 아이들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이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말과 행동으로 검역을 거치고, 시간을 두고, 아, 괜찮구나 싶은 사람을 내 정원으로 안내하는 것.

하지만 가끔은 검역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것처럼 마음이라는 정원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사람. 눈을 사납게 뜨고 경계해보려고 애쓰지만, 날을 세운 가시가 무안하게 꽃이 되어서 마음에 곱게 피어난 사람.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마음속에 심은 사람. 꽃처럼 여겨주는 사람. 꽃처럼 여겨주었던 사람. 그리고 희한하게도 영영 검역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이 검역도 없이 정원에 들어오고 어떤 사람은 영영 통과하지 못해 시들어버리는지 아직은 알 도리가 없다. 심어 둔 꽃들을 오래오래 잘 돌보다 보면 답을 알게 될까. 언젠가는 알 수 있게 되길 바란다.

Photo by chara_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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