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승리를 위한 인문학적 고찰
10월 30일, 관인중고등학교에서 지역 초중고 학생들이 함께하는 넘나들이 축제가 열렸다. 관인면에 있는 모두 모인 행사지만 초등 20명, 중등 20명, 고등 60명 합해야 100명도 안 됐다. 내가 중학생 때에는 우리 학년만 100명이었는데. 학생들이야 수업 안 하니 좋고, 동네 주민들도 구경 오고, 먹을거리도 풍성하고, 어쨌든 즐거운 자리였다. 나는 열심히 음식셔틀을 했다.
축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 곳이 하나 있었으니 버스킹 부스였다. 두 고등학생이 수줍은 얼굴로 마이크를 붙잡고 말했다. “노래 부르러 오세요.” 마음속으로 ‘오겠냐?’ 싶었지만 많은 아이들이 왔다. 학생들은 노래와 만추의 기운에 푹 빠져 저마다 노래를 불렀고, 그 앞에 모인 관객들은 환호했다. 남들 앞에 나가서 부를 정도니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저 정도야 나도?’
“더 부르실 분 없으세요?”라는 질문에 하마터면 손을 번쩍 들 뻔했다. 조장혁의 <중독된 사랑>? 김범수의 <슬픔활용법>? 속으로 어떤 걸 할까 고민하다 그냥 꾹 참았다. 여기는 학생의 장소이지 아저씨가 나설 곳이 아니니까. 집에 와서 초6인 딸 당근에게 물었다. “아빠가 나가서 노래하면 어땠을 거 같아?” 당근은 얼굴로 욕하며 말했다. “아는 척 안 할 거야. 절대로!”
하긴 초등학교 학부모회 부회장인 나는 엄마들 사이에 껴서 어묵 꼬치를 끼고, 트럭으로 음식을 나르고, 쓰레기를 정리하는 게 낫지. 문득 아이들이 다 먹고 가져온 꼬치를 부러뜨리며 ‘자리’에 대해서 생각했다. 분명 그곳은 내가 노래 부를 곳도, 주목받아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서 노래하고,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 내가 환대받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날씨가 이상해, 씨
10월 9일, 우리 동네에서 세계드론제전이 열렸다. 한탄강댐 건설로 수몰지가 되기 전에는 부모님이 농사짓던 땅, 강산이 변해도 제대로 변했다. 휴일에는 집 밖을 나가지 않는 당근이 저 멀리 길에 서 있는 차들을 보며 말했다. “태어나고 13년 만에 처음이야!” 이 말을 들은 어머니가 덧붙였다. “태어나고 75년 만에 처음이야!” 그런 어머니에게 처음인 게 또 있었으니….
바로 가을장마이다. 가을에 무슨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지 9월에는 30일 중에 13일이나 비가 왔다. 가을 하면 천고마비의 계절. 하늘이 높아야 하는데, 비 오고 잔뜩 흐린 날씨에 벼 베기 작업이 마비가 되었다. 비가 오면 콤바인 작업을 할 수 없다. 비 온 다음 날을 일이 몇 배는 힘들어진다. 작업 일정이 꼬이면서 농부들 입에서 “무슨 가을이 이래.”하는 한탄이 나왔다.
예상치 못한, 그러니까 보통 오지 않던 시기에 비가 온 건 가을뿐 아니다. 봄부터 많이 왔다. 모를 심기 위해 논을 갈고 로터리를 치려면 물을 대야 하는데, 때마침 비가 온대서 아버지가 논의 물꼬를 막으러 갔다. 그런데 아버지는 늦도록 돌아오지 않고 전화가 왔다. “논둑이 터졌어. 오늘 밤에 비 많이 온다는데 지금 막아야 해.” 해는 졌고, 밥은 못 먹고 논으로 향했다.
참, 그 많은 논둑 중에 하필 퇴수로와 연결된 내 키보다도 높은 논둑이 터지다니. 쥐굴이나 뱀굴에 때 아닌 빗물이 많이 들어가 터진 것이다. 삽질 몇 번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나는 트랙터에 불을 켜고 일단 아래에 받칠 큰 돌을 찾아다녔다. 큰 돌을 많이도 갖다 놓고 흙을 트랙터 바가지로 떠서 넣었다. 일단 일은 마쳤지만, 이 봄에 웬 비가 이렇게 오나?
여름에 장마나 태풍은 항상 있다. 그런데 그것들은 보통 때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이것들의 때를 도저히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때에 폭우가 쏟아지면 농부가 어떻게 손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올해는 평소보다 일찍 물을 뗐다. 논바닥을 단단하게 하고 벼가 뿌리를 깊게 박으라고 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린 벼들이 엄청난 고생을 해버렸다.
여름은 왜 이리도 뜨거운지. ‘덥다’란 말은 더 이상 우리 여름을 담아내지 못한다. 그냥 뜨겁고 말 거라면 잠시 피하면 그만인데, 기후가 바뀌니 벌레가 밭에 엄청나게 많아졌다. 멀쩡하게 생긴 고추에도 작은 구멍이라도 하나 보이면 그 안에는 이미 벌레가 입주해 있다. 올해 고추는 따는 거 반 버리는 거 반이었다. 아무리 ‘괜찮다, 괜찮다’ 해도 쓰린 속은 어쩔 수 없다.
사라진 반딧불
보통 8월 말에 배추를 심는다. ‘왜 그때 심냐?’라고 물으면 ‘수십 년 전부터 그랬지요!’라고 답해드리지. 올해도 별생각 없이 그때에 밭을 갈고 비닐을 씌워 배추 모종 300개를 심었다. 그런데 이놈들이 자라는 게 영 시원치 않았다. 배추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낮에는 잎이 축 늘어져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밭을 서성이는 아버지는 결단했다. “뽑아버리고 다시 심자!”
300개 중 250개를 뽑아 버리고 다시 심었다. 그 원인은 기온이었다. 배추는 30도 위로 가면 자라지 못한다. 보통 8월 말이면 기온이 떨어지고 시원한 기운이 돌아야 하는데, 올해는 그러지 못했다. 9월 초까지 30도가 훌쩍 넘는 폭염이 이어졌다. 그 생각을 못하고 배추를 심었으니, 가엾은 배추가 온열질환에 걸릴 수밖에. 모종 값도 값이지만 올해 김장이나 할 수 있겠나.
뜨겁던 열기가 9월이 되고 한풀 꺾였다. 그런데 꺾여도 너무 꺾였다. 9월 중순부터 기온이 급강하했다. 적당히 시원해져야 배추가 자라는데 날이 너무 서늘하니 배추가 제대로 크지 않고 있다. 배추뿐 아니다. 가을에 날이 쨍해서 곡식이 여물어 가야 하는데 날이 춥고 흐리니 곡식이 살을 찌우지 못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60년 농사짓던 중 올해 같은 해가 없었다.”
가을은 드라이브의 계절이다. 일을 하러 가면서도 예쁘게 물든 나뭇잎을 보면 그냥 마음이 좋아진다. 며칠 전 포천에 나가는데 초록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은행잎이라고 하면 노랗게 떨어져야 제 맛인데, 채 곱게 단장하지 못한 잎들이 서리를 맞고 떨어졌다. 올해 산을 보면 울긋불긋 곱게 물들지 못하고 서둘러 겨울을 맞이하는 당황한 모습이 보인다.
2012년 6월.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처음 들어왔다. 도시에서 살다 시집온 부천댁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 무척 심심해했다. 8월 중순이 지나고 밤에 나왔는데 집 뒤에서 뭔가 반짝하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반딧불이었다. 내가 시골에 살 때는 흔했던 개똥벌레, 하지만 지금 볼 수 없어 노래로만 만나는 반딧불. 나는 아내에게 외쳤다. “우리 반딧불과 같이 살고 있어!”
나는 8월이 되면 반딧불을 기다린다. 그들은 기다림에 보답하듯 매년 우리 집을 찾아주었다. 그런데 올해는 8월이 다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다. 슬펐다. 이제 영영 반딧불을 못 보는 것인가. 자랑할 거 없는 내게 큰 자랑이었는데. 그런데 9월이 되고 날이 선선해지면서 반딧불이 찾아왔다. 너무 반가웠다. 폭염에 고생했을 그들이 안쓰러웠다. 내년에 다시 보자고 약속했다.
벼농사, 나의 변호사
나는 중학교를 이곳에서 나오고 의정부로 유학을 갔다. 중학교 때 IQ 검사에서 140이 나온 나는 그곳에서도 공부를 제법 잘했다.(물론 모두가 그렇듯 수능을 망쳤다.) 그 시절 나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친구들은 지금 대기업에서 제법 높은 자리에 앉아있다. 기업을 운영하는 친구들도 있다. 이 말은 그들이 버는 돈과 내가 버는 돈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 반이나 될까?
도시에서 알바도 하고, 직장생활도 해봤다. 시급을 받아보고, 월급도 받아봤다. 도시에서 시간은 돈이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시간과 돈 사이에는 별다른 인과관계가 없다. 물론 기본적으로 일을 해야 수확을 얻지만, 더 많이 한다고 해서 더 많은 수확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이른 봄에 돌을 고르는데 0원, 한여름에 풀 깎는데 0원, 한밤중에 일을 해도 0원. 빵빵빵 퍼레이드다.
며칠 전 의정부에서 지인들이 와서 함께 들깨를 떨었다. 마당을 크게 펴고 들깨를 잔뜩 실어다 놓았다. 치고 뒤집고, 뒤집고 치고 도리깨질만 네 번이다. 들깨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치고 마당을 정리하니 나온 들깨는 한 아름 정도? 건축 일을 하는 아저씨가 말했다. “도대체 몇 명이서 아침부터 이러고 있는데 이 정도밖에 안 나와? 수지타산이 안 맞아!”
아저씨의 말을 듣고는 이제 빙그레 웃는다. 나도 같은 고민을 할 때가 있었다. ‘내가 어디 가서 이것보다 못 벌까?’ 하지만 내 생각은 이미 정리가 되었다. 세상에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자신을 갈아 넣어야 한다는 것, 노력 이상의 대가는 다 사기나 갈취라는 것, 나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나를 잃을 정도로 바쁘게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
언젠가 논에 갔을 때 땅이 말했다. ‘쫄리냐? 돈 많이 못 버는 게 부끄러워? 햇빛, 물, 공기. 중요한 건 내가 다 주잖아. 그렇다고 너 굶냐? 하고 싶은 거 못하냐? 나는 네가 나를 떨 착취해서 고마워. 기를 쓰고 빨아먹으려는 놈들 때문에 내가 죽겠다. 나라고 그렇게 뜨겁고 싶겠냐? 사람들 죽어나가는데 그렇게 비를 뿌리고 싶겠냐고. 그런데 어쩌겠냐. 나도 살아야지.’
지구가 뜨거워지고 날씨가 이상해진 이유는 단순하다. 인간이 지구로부터 너무 많은 에너지를 뽑아 먹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닌 지구 관점에서 볼 때 나는 덜 버는 게 아니라, 덜 뽑아먹는 것이다. 쓸 게 없는 게 아니라 아껴주고 있는 것이다. 초록의 어린 이삭에 맺힌 이슬에 반짝이는 아침 해를 보고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안도했다.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다!
코스모스
그 이후로 나는 덜 벌고 덜 쓰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책 두 권을 내고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은 것은 내 글과 베일 나무를 생각했을 때, 글이 나무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아파서 시골에 왔습니다>라는 책을 낸 이유는, 결혼하고 배운 가장 큰 깨우침, ‘아내 말 잘 들어야 인생이 편하다!’를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나무야 미안, 나도 살아야지.
4월에 첫 문장을 쓰고, 7월에 원고를 마무리했다. 처음 강요를 받았을 때는 싫었지만 쓰다 보니 은근히, 아니 대놓고 재밌었다.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도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를 더 긍정하게 되었다. 이게 어디 나만 그럴 것인가.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재밌는 이야기,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쯤은 다 있었다.
이 책은 포천문화관광재단 ‘모든예술31’에 선정돼서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만약 도시에 있었으면 무명의 작가에게 이런 기회가 왔을까? 나는 포천, 그리고 관인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으면서 누리는 게 많다. 아무 경쟁 없이 학부모회장도 하고, 반장도 하고, 누군가의 선생님이 되었다. 고요한 아침에 새소리를 듣는, 밤에 많은 별을 볼 수 있는 이곳이 바로 나의 자리이다!
얼마 전 예전부터 여러 차례 도전했다가 실패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다시 꺼내 들었다. 여전히 힘들지만 거기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문과인 내가 정확한 수치를 다 기억할 수 없지만 이 우주에는 태양과 같은 별이 무수히 많다는 것, 그 별에 딸린 지구 같은 행성은 더 무수히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지구를 우주 먼지, 혹은 해변의 모래알이라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사람이 살만한, 지구와 같은 환경을 가진 행성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가능성이 있는 곳이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 좀 더 심한 말로 하면 환상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죽을 때까지 지구에서 살아야 하고, 지금 나 살고 있는 곳을 긍정해야 한다. 여기서 잘 살지 못하면 다른 곳에 가서 잘 살 수 있을까?
한때 나도 태양이 되고 싶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기운을 주는 게 더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한없이 밝고 뜨거운 태양보다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며, 나무가 있는 지구가 더 좋다. 한때는 유명한 누군가가 더 반가운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지금 곁에 있는,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이 더 좋다. 지금 이곳이 내가 환대받는 자리입니다!
“당신이 지구입니다. 나의 지구가 돼주어 고맙습니다.”
<아파서 시골에 왔습니다> 출간기념회 강의자료(2025. 1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