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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들 Oct 15. 2024

말 잘 듣는 아이

날 위해 산다

 난 말 잘 듣는 아이였다. 토 달지 않았다. 거절하지 않았다. 웬만하면 오케이 했다. 이렇게 살아왔다. 별 문제없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착한 사람이었다. 정직했다. 순한 사람이었다. 성실했다. 날 대체로 이렇게 불렀다. 나쁘지 않은 평가였다.

 사람 사이 문제가 없었다. 거절을 안 해서였다. 갈등을 만들지 않았다. 사전에 차단했다. 미리 피했다. 아니면 순응했다.

 뭔 일이 나면 골치 아팠다. 스트레스받았다. 일어나지 않는 일에 불안했다. 예민했다. 사소한 일, 복잡한 일 다 그렇게 다뤘다. 늘 평탄하기만 바랬다. 사람과의 관계에도 그랬다.

 안정이 가장 중요했다. 내 욕구보다 우선이었다. 상대방 말 잘 듣는 게 상책이었다. 타인 기분을 잘 살폈다. 잘 보이려 애썼다. 내 말과 행동을 억눌렀다. 싫어도 억지로 했다. 내 욕망은 잘 밀려났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조건 열심히 했다. 회사 말 잘 들었다. 시키는 대로 충실히 했다. 안 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다. 남 좋은 일만 했다. 내 속은 별로였다. 꾹꾹 눌러 담았다. 그렇게 15년 정도 지났다.

 어느 날 그냥 힘들었다. 이유를 몰랐다. 다들 그런 줄 알았다.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라고 여겼다. 유세 떨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정신력 문제라고 돌렸다. 날 더 통제했다. 완벽한 사람이 되려 했다. 사실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결국 부작용이 났다.

  지쳤다. 완전히 방전됐다. 의지가 없었다. 무기력했다. 축 쳐졌다. 즐겁지 않았다. 공허했다. 지금까지 삶이 무의미했다. 내 손에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의심 들었다. 나를 믿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잘 몰랐다.

 무명인 터널을 지났다. 어떻게 들어갔는지 기억이 없었다. 나갈 방법도 몰랐다. 끝이 안보였다. 아는 게 없으니 원래 하던 대로 했다. 운동했다. 회사 갔다. 퇴근했다. 밥 먹었다. 그래도 출구는 못 찾았다. 다행히 주저앉지 않았다. 그럴 틈이 없었다. 나한테 주어진 일을 해야 했다. 회사일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아이러니하게 내 삶을 지탱했다. 세상 일은 알 수 없었다.

 내 안이 텅텅 비어갔다. 뭔가 잘 못 됐음을 감지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갉아 먹힌 내면을 채워야 했다. 뭘로 메울지 고심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세가 없었다. 몸과 마음 다 여유가 없었다. 단순하게 봤다. 지금과 반대로 했다. 그러면 보충될 거라 믿었다. 막연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말  안 들었다. 그렇다고 개기진 않았다. 욕 안 먹을 정도로만 했다. 예전처럼 맹목적이지 않았다. 남 좋은 일만 하지 않았다. 참았던 내 말을 했다. 가뒀던 내 행동을 깨웠다. 더 이상 착한 아이가 되지 않았다.

 나를 잘 살폈다. 뭘 좋아하는지 찾았다. 하고 싶은 게 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를 우선순위로 뒀다. 다른 사람은 나중으로 미뤘다. 개인주의자가 됐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방향을 잡아갔다. 내 꿈을 이뤄 가기로 했다. 재밌는 일을 할 것이다. 즐겁게 살기로 했다. 내 인생이었다. 타인이 책임지지 않았다. 이제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빛이 보였다. 희미했지만 반짝였다. 출구였다. 나갈 수 있었다. 마음이 뜨거웠다. 힘이 솟았다. 희망이 생겼다. 더 잘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그 따뜻한 곳으로 접근했다. 이제 동굴 밖이었다.

 내 꿈을 향한 목표를 세웠다. 차근차근 준비했다. 길게 봤다. 10년으로 생각했다. 이제 회사는 삶의 목적이 아니었다. 도구에 불과했다. 우리 가족 삶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회사일에 80%까지만 쓰기로 했다. 예전처럼 200% 안 쓴다. 이제 늙어서 하라고 해도 못한다. 남은 에너지는 더 중요한 일에 쓴다. 날 위해 산다. 그렇게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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