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고민의 묶음
인종차별이 청소년의 건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탐색하는 연구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다른 나라들과 협업하는 프로젝트였고 나는 국내에서 태어난 이주배경이 있는 청소년(다문화가정 청소년)을 만나기로 하였다. 심층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자신의 배경이 일상이나 학교생활을 하면서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진로탐색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는지 등을 질문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차별의 경험을 물어보는 것이 부담되었고 민감한 주제를 어떻게 풀어내야할지 고민되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차별을 경험했는지 묻지 않지만 청소년을 대상으로 부정적인 경험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또한 차별을 경험했다는 것을 전제하는 듯한 연구 주제와 질문 목록이 불편하기도 했다. 이주배경이 있는 청소년의 차별 경험에 관한 선행연구나 언론에서 다루는 기사를 찾아 읽었으나 모든 청소년이 학교생활이나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아닐 터였다. 인종차별이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대전제에 동의하면서도 소수집단 연구가 개별의 존재들의 긍정적인 면을 발굴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인종차별을 경험한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일상을 살면서 거대한 구조에 균열을 내며 살아가는 개인의 주체성에 더 주목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그러저러한 감정들이 엉켜 초반에는 청소년을 만나면서 확신에 차서 연구를 소개하지 못했고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해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계속 주저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만난 청소년들은 내가 우려했던 걱정과 고민을 비켜나갔다. 그들은 연구 주제에 대해 딱히 불편해하지도 않았고 내가 던지는 질문들에 흥미를 느끼기도 했으며 나름의 생각을 전달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청소년들의 경험은 그들이 처한 가정환경, 지역, 성격과 성향에 따라서 달랐으며, 우려한 만큼 학교생활에서 차별 경험이 높지 않았다. 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 결혼이주로 한국에 온 여성이 어머니였던 청소년들은 외형적으로 ‘한국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한국 국적을 갖고 태어난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어도 원활했으며 학교나 병원에 가는데 큰 장벽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 중 한명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겪을 수 있는 자신의 부모가 맞닥뜨리는 임금차별이나 구직 시 종류가 한정적인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고용의 한계는 경제적 제약으로 이어지는 것을 감각했다. 부모 간의 갈등이나 부모와의 갈등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도 있었는데, 여느 가정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주배경이 있는 가정인 경우 일어날 수 있는 형태의 어려움도 존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생애주기적 경험은 청소년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진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 ‘다문화’라는 배경은 ‘다름’을 나타낼 수 있는 특별하고도 뽐내고 싶은 요소이기도 하고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자산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청소년들은 자신과는 크게 관계없이 받아들이기도 했다. 차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별로 언어화할 수 없지만 무언가 불편하고 이상한 미세한 차별이 오래된 기억 속에 박혀 있기도 했고, 나와는 거리가 먼 다른 사람의 일이라고 치부하는 청소년도 있었지만, 개별이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인 차별의 형태를 삶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도 있었다. 그것을 당사자가 인지하든 하지 못했든 말이다.
청소년을 만나면서 생각이 들었다. 정작 나는 인종차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었나. 한국사회에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개별의 사건으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주노동자들의 정주를 허용하지 않고 사업장 변경을 불가하게 하는 고용허가제, 전쟁을 피해 또 다른 삶을 꿈꾸며 힘겹게 찾아온 난민들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 한국사회와 한국문화에 빨리 적응해야만 하는 결혼이주여성 등의 상황과 주제들 말이다. 인종차별이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젠더와 계급을 관통하여 어떻게 한국사회에 존재하고 개별의 존재들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 말이다. 염운옥의 <낙인찍힌 몸>은 인종차별의 역사를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짚어내며 한국의 현재를 인종주의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말하고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염운옥은 한국은 이주민의 정주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민 정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혼이주여성은 유일하게 영구 거주를 전제하에 정착할 수 있는 제도에 속해있는 존재들이다. 자유주의만으로 소수집단의 평등을 보장해 줄 수 없어 탄생한 다문화주의 이념과는 다르게, 한국에서 다문화는 제도 속에 편입되어 사용되고 있다. ‘다문화’는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 아니라, 한국문화와 구분할 때 사용되었으며 구체적으로 특정 지역과 국가에서 한국으로 온 여성들이 한국에서 가정을 꾸리는 현상과 이들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다문화가정과 국제결혼이 다른 의미인 것처럼 말이다.
<낙인찍힌 몸>을 읽으면서 한 가지 깨달았던 점은 인종주의와 인종차별의 당사자에 관련한 다양한 사례를 접했으나, 이 사례들이 인종주의를 고착화시킨 구조와 존재들에 대한 분노로 다가왔지 인종차별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다문화가정 청소년들의 차별 경험에 치우치다 보면 그들이 가진 피해자성만 부각될 뿐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을 경계했는데, 그것은 저자가 자신의 관점을 어떻게 글로 전개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한번 더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인종차별을 경험한 개별의 사례가 등장하며, 어떤 존재들은 자신의 생애주기 속에서 극단적으로 인종주의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럼에도 이 주체들이 수동적인 존재로 비추어지거나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이들을 둘러싼 구조에 대한 명징한 분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조 속에서 개별의 존재를 읽어내려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들인데, 나는 당연한 이야기를 저 앞에 두고 꽤 오랜 시간을 헤맸다. 머리로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겪지 않으면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들, 깨닫고 나서야 당연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 인종차별이 청소년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하는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주 어렵게 찾은 청소년 인터뷰가 남아 있고 아직 글로 풀어내지 않았다. 이제야 고민이 정리되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