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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없는 영 May 03. 2018

각자 다른 곳에서
'돈'이란 달을 바라본다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거부한 철없는 영이의 성장 이야기

월평균 수입 50만 원. 그중 매달 2만 4천 원씩 사라지는 인터넷 통신요금.. 그런데 어느 날, 아무런 예고 없이 2만 9천 원의 통신요금이 통장잔고로부터 자취를 감췄다. 5천 원의 차액.. 커피 한 잔 값에 불과한 이 작은 돈의 출금은 50만 원짜리 내 모래무덤에 꽂은 표지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모 통신사는 예고도 없이 5천 원만큼의 모래를 단번에 긁어갔고, 나는 쓸려나간 모래에 흔들거리는 표지를 보며 다급히 통신사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 3년 약정이 끝나서 받으시던 할인을 더 이상 받으실 수 없네요"


"아, 그래요? 그럼 뭐.. 이제 그만 쓰도록 하죠. 해지해 주세요"


그리고는 단 한 번의 만류도 없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해지절차. 해지를 하겠다고 나서면 다급하게 다양한 할인을 늘어놓는 그들의 진부한 영업방법을 이용하려던 내 계획은 제대로 말 한 번 꺼내보지 못하고 머쓱하게 꼬리를 감춰야 했다.


'그래, 이 참에 다 끊어버리자'


사실 저렴하게 사용 중이던 인터넷 서비스는 몇 해 전 이혼한 전 남편의 명의로 되어있었다. 해지도 변경도 모두 명의자의 동의가 필요했던 불편한 과정들.. 무엇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와 달랑달랑 붙어있는 마지막 연결고리도 모두 끊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시원하게 구질한 과거와의 연을 쿨하게 끊어낸 후,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하~~ 고객님, 어디가 이해가 안 되세요? 상식적으로 (블라블라 블라)...


내가 지금 외계어를 듣고 있는 것일까?
나의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상담사라는 그녀에게 치명적인 언변 부조리의 장애가 있는 것일까?


들으면 들을수록 모호해지는 숫자들과 혜택들.. 초고속 인터넷의 속도 비교와 결합상품, 추가 할인, 신용카드 연계 등 대체 나라는 인간이 이런 세계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동안 사회는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는지를 인터넷 고객센터 상담사를 통해 절감하게 될 줄이야..


저렴한 요금제를 사용하기 위해 가격을 묻고 또 묻는 내게 상담원은 자사의 현란한 통신체계와 상품들로 장전한 권총을 정신 차릴 틈 없이 쏘아댔고, 나의 이해가 다소 느리다 싶은 지점에서는 연신 '상식적으로'라는 표현을 써대며 맹공격을 이어갔다.


어버버버 대답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덧 최면에 걸린 듯 신규가입의 계단에 발을 디디고 있던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씀해주시는 부분들 명료하게 다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고.. 조금 더 생각해보고 다시 전화드릴게요"


"아니, 고객님. 어느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지금 가입하시면 제가 사은품도 더 드릴 거고 (블라블라 블라)..."


바짓가랑이를 물고 절대 놔주지 않는 그녀였다.



"제가 이런 건 관심도 없었거니와 직접 신청해본 적도 없고 해서.. 그쪽이 답답하신 줄은 알겠으나, 지금 말씀하시는 게 명확하지도 않고 해서 좀 더 생각해볼게요"


"그렇다면 고객님, 제가 퇴근시간에 다시 한번 전화드리면 안 될까요?"


감정노동으로 고생하는 상담원들의 인권에 대해 사회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고객을 엄하게 가르치는 상담사란 좀체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고압적인 태도는 나로 하여금 이러한 세계와 멀어져 지낸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란 걸 힘겹게 고백하게 했다.


전화를 끊고 이어진 문자..


-X월 X일 X시 경에 인터넷 신규 설치로 방문드리겠습니다-


그녀의 고압적인 자세에 저항하지 않고 부끄러운 고백성사까지 치른 나는 급기야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난 특정한 날에 인터넷을 설치하라고 그녀에게 가입신청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호갱님인가?'


여차저차 설명을 늘어놓는데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해서, 폭풍처럼 몰아붙이면 어버버버 가입을 밀어붙일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상담원에게 있었나 보다. 그 생각을 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녀의 이름 석자를 민원 신문고에 던져버리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그 상담원이었다.


"접수 취소한다고 고객센터와 통화 완료했습니다"


"아, 그러세요 고객님. 근데 다른 통신사는 얼마에 요금 제공하던가요?"

"그건 둘째 치고, 제가 언제 신규 설치하라고 신청했나요? 왜 신청하지도 않은 일을 그렇게 처리하셨어요?"


권총으로 연발을 날리던 고압적인 상담사는 대뜸 넙죽 엎드린다. 본인 판단 하에 가장 빠른 설치일을 임의로 신청했다며 죄송하단 말을 연신 반복했다.


민원을 넣으려 통화버튼을 누르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저렴한 요금을 사수하기 위해 모든 통신사를 반쯤 사기꾼 대하듯 했던 나, 본인의 실적을 위해 막무가내로 비싼 요금제를 고압적 자세로 들이밀던 상담원.. 우린 몇 분 동안 이야기란 걸 하고 있었으나 실상 자본주의란 방에서 나란히 공중에 뜬 '돈'이란 달을 바라보며 독백을 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나 나나 우리는 그 순간 서로 슬픈 존재였다. 자본주의 톱니바퀴를 유연하게 굴려야 하는 인격도 개성도 없는 수단으로써만 기능하는 존재들..



자본주의 힘 있는 권력자는 편리함을 앞세워 정신도 차릴 수 없는 매력적인 미끼를 던져놓고 촘촘히 엮인 그물로 고객을 낚시한다. 하나를 물면 순차적으로 여러 개의 바늘이 입 속으로 정신없이 딸려오는 체계적인 낚시 시스템.. 뒤늦게 하나의 바늘이라도 뱉어내려면 위약금이라는 내장을 함께 게워내야 하는 합법적인 폭력 시스템..


이 멍청해 보이던 의심 많은 물고기가 미끼 주변만 맴맴 돌고 있을 때 그녀는 얼마나 속이 탔을까..  



/ 철없는 영  그림/ m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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