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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반 걸음 뒤에서 걷기

by 봉천동잠실러

2025. 8. 21. (목)


결혼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내가 걸음이 빠른 편이다. 아마 회사를 다니며 자연스레 빨라진 것 같다. 회의가 많고 업무가 많았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금 천천히 걸어. 숨 차…”


4년 전 즈음인가. 함께 산책을 하던 아내가 숨이 차다고 말했다. 당시 아내는 첫째를 품고 있었는데, 우리가 살던 관악 인근은 경사가 가팔랐다. 안 그래도 경사가 가파른데 남편이 걸음도 빠르니 임신한 아내가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아내에게 사과를 하고, 아내 발을 보며 반 걸음 정도? 천천히 걸었던 기억이다.


그런데 첫 육아휴직 때는 혼난 기억이 별로 없다. 아마 육아휴직과 함께 ‘회사 자아’도 쉬러 들어갔는지, 아니면 첫째 유모차를 함께 끌다 보니 그랬는지, 휴직 때는 아내와 걸음이 맞을 정도로 느리게 걸었다.


신기하게도, 작년 복직하자마자 거짓말처럼 걸음은 다시 빨라졌다. 지하철에서든 회사에서든 계단을 두 칸씩 오르며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해서, 따로 운동을 한 적이 없음에도 건강검진 때 하체 근력이 올라갔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돌아보면, 휴직을 하면 걸음이 느려지고 복직을 하면 걸음이 다시 빨라지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다.


얼마 전 추억을 떠올리며 들렀던 관악 신혼집. 신생아였던 첫째가 어엿한 유치원생이 되었다.


“아빠. 힘들어요. 천천히 가요.”


두 번째 육아휴직을 한 지 두 달. 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 걸음이 빠르다.


4년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이제는 아내뿐 아니라 두 명의 '걸음 감시자(?)'가 있다는 것. 바로 호기심 대장 첫째와 둘째다. 특히 둘째는 매일 아침 등원 때마다 단지 안에 있는 어린이집까지 걸어가는데 20분이 걸리는 마법을 부리곤 한다. 가다가 개미 구경하고, 또 가다가 나무 구경 하고, 그러다 경찰차 지나가면 벤치에 앉아 차들을 한참 구경하다 들어간다.


"빨리 가자. 일어나"라고 재촉을 하다가도, '아니지. 급할 게 뭐가 있나. 출근을 하는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면 같이 쭈그리고 앉아 개미 구경하고, 또 나무 구경하고, 같이 버스정류장에 앉아 '어. 소방차다. 충성' 이러면서 땀방울을 송골송골 키우곤 한다.


결혼을 하고 또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게 어쩌면 '걸음을 맞추는 법을 배워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아내가 힘들 땐 그 발을 보며 반발자국 뒤에서 걷고, 아이가 멈출 땐 조금 답답해도 가만히 서서 기다려주고.


'내 걸음'이 아니라 '네 걸음'에 맞출 줄 알게 되는 것이 '가족을 이뤄가는 것'이 아닐까.


내일은 아내의 막달검사가 있다. 내일 아침에는 조금 더 의식해서 천천히 걸어봐야겠다.


발걸음부터 느린...여유 대마왕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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