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랜만에 배낭을 쌌다

ep1.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

by 양탕국

드디어 내일이다. 정확히는 10시간 후.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를 시작한다. 지금 나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여러 종류의 길 중 가장 잘 알려진 프랑스길의 시작점, 생장(Saint-jean pied de port)에 있다. 계획대로라면 내일부터 한 달이 조금 넘는 동안 약 800km를 걸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도착할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볼까 하는 마음을 아주 안 먹었던 건 아니다. 나는 진작 이 길을 알고 있었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국적을 순위별로 줄 세우면 한국인이 3위라는데, 어쩐 일인지 내 주변 인물 중엔 한 명도 이 길을 걸은 사람이 없었을 뿐이다. 그래서 ‘여행자’가 아닌 ‘순례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제 짐을 등짝에 거북처럼 진 채 묵묵히 걸어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과정을 겪은 스스로가 대견해서 나는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는 그런 이야기, 이 길만 완주하면 삶이 180도 달라질 것 같지만 실상 삶을 대하는 자세는 더 담담해지더라는 이야기를 전설처럼 전해 듣기만 한 것이다.

나는 배낭여행을 해본 적도 있고, 홀로 여행하는 건 도가 텄고, 태국에선 명상을 한답시고 스스로를 묵언 수행에 가두기도 했었다. 순례길에 관심이 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늘 관심에서 그쳤다. 나에게 한 달 이상의 여행을 할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걸 오롯이 걷는 데 쓴다? 왠지 그건 아깝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순례길이 선뜻 내키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배낭을 멘다는 것이었다. 단지 여행 가방을 캐리어에서 배낭으로 바꾸는 것뿐인데, 그 간단한 변화가 여행의 전 과정을 꽤 복잡하게 만든다. 보통 수하물로 부치는 24~25인치의 캐리어엔 20kg가 조금 덜 되는 짐을 넣을 수 있고 바퀴의 도움으로 그 무게를 수월하게 견뎌낼 수 있다. 캐리어 내 공간만 허락한다면 여행을 다니며 사고 싶은 물건도 고민 없이 지를 수 있다. 그러나 배낭은 다르다. 내가 온전히 내 힘으로 지고 날라야 한다. 그래서 지난 배낭여행에서도 현지에서 세일가라며 덜컥 사버린 옷을 몇 번만 입고 버릴 수밖에 없었고(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물건을 버려야 했는데 가장 손이 덜 가는 옷이었다), 기념품을 구입하고 싶어도 침만 꼴깍 삼키고 말기도 했다. 당시엔 그게 다 아쉽고 이게 무슨 짓인가 싶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소를 벗어나면 그 물건에 대한 물욕도 사라지고 마는 일을 경험했었다. 그건 분명 좋은 경험이다. 여행을 하며 채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비워보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우리가 너무 많이 가지려고만 한 건 아닐까 짧게나마 돌아보게 된다. 당시 10kg에서 시작해 12kg까지 부피가 커진 배낭을 이동할 때마다 이고 다니는 것도 힘에 겨웠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선 이 배낭을 메고 종일 걸어야 한단다. 그러니 관심이 가더라도 실행하기에는 두려웠다.

프랑스길 시작점인 생장 마을의 풍경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순례길의 시작점에 있는가. 그건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순례를 준비하거나 순례 중인 사람들에게 정보의 바다로 여겨지는 한 네이버 카페를 둘러보다 보면, 순례길 걷기를 결정하는 덴 의외로 엄청난 결심보다는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다 보니 길 위에 있더라는 얘기를 한다. 그동안 손사래를 쳤던 순례길을 왜 걷기로 했는지는 앞으로 걸으며 알게 되지 않을까. 일단은 가고 싶은 마음이 두려운 마음보다 커졌기에 여기에 있다고,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다.


생장에 저녁 늦게 도착하였기에 첫날밤은 숙소에서 차려주는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생장에서 산티아고를 향해서가 아닌, 산티아고에서 생장을 향해 여행했다는 네덜란드인 부부와 함께 방을 썼다. 한 달간의 여행 기간 중 1주일 정도를 걷는 데 할애했는데 그 경험이 너무나 특별했다고 아주머니가 말한다. 친절하게 내 일정도 이것저것 물어봐준 덕에 한국을 떠난 지 3주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대화라는 걸 해본다.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아주머니는 내 손을 잡으며 “부엔 까미노 Buen Camino”라고 말한다. 순례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서로 건넨다는 인사말이다. 아직 내겐 어색하기만 한 그 말이 차츰 익숙해질까.


두 번째로 그 인사말을 들은 건 순례자 사무소에서다. 이곳에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는데, 그 작은 소책자가 내가 순례자임을 앞으로 증명할 것이다. 순례길에 자리한 숙소와 식당을 방문한 뒤 도장을 받아 소책자를 채우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완주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오후엔 당일 도착하는 예비순례자들로 북적인다고 들었기에 사무소 오픈 시간인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 도착할 수 있도록 움직였다. 자원봉사자로부터 순례자 여권을 받고 주의사항을 들은 뒤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답을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가 “부엔 까미노”라고 말한다. 아직도 어색하다. 프랑스어를 쓰는 봉사자이기에 그저 “메흐씨 Merci”라고만 답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바구니에 2유로를 기부하고 순례자의 상징인 가리비 껍데기를 하나 골랐다.


순례자 사무소가 있는 골목(좌) / 가리비를 단 내 배낭(우)


여전히 실감 나지 않지만, 내일이면 실감하겠지. 막상 와보니 오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거창함은 꽤 많이 지워지고 걱정과 두려움이 커지기도 한다. 내가 너무 길치라 걱정된다는 말에 순례자 사무소의 봉사자는 말했다. 길 알려주는 어플을 꼭 자주 확인하라고! 그래서 오늘 부랴부랴 데이터 사용량 확인하고 e-sim도 새로 구매했다. 내일 입을 기능에 충실한 옷도 미리 정돈해 뒀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걷기만 하면 된다. 그저 다치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