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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순 Oct 26. 2021

깨끗한 사람

알람 소리.


새벽 여섯 시만 되면 굴착기의 파쇄음과 인부들이 일으키는 마찰음이 창 안으로 새어온다. 분명 빛은 소리보다 빠르다는데, 내 방은 이 물리학의 법칙을 무시한 채 빛보다 먼저 다가온 소음이 나를 깨운다. 누군가 삶의 터전을 부수는 소리. 바닥에서 바닥을 깨는 소리. 다시금 바닥이 바닥을 깨어 지하로 내리 처박히는 소리. 중산층이 늘어나는 소리. 가난해지는 소리. 이 소리는 어쩌면 귀가 아니라 안을 채우고 채우다 흘러넘쳐 내가 스스로 깨이는 건지 모른다. 일어나 슬며시 창밖을 내다보면 지난밤보다 부쩍 높아진 콘크리트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수십 채의 집을 허물고 높은 용적률의 아파트를 세워 올리는 일.


내 방 창가 뒤편을 빼곡히 채우던 작은 연립주택들 앞으로 부직포 가림막을 세운 인부들이 하루아침에 이 모든 걸 박살냈다. 내 방 창가, 고층에서 바라보던 이 풍경이 너무나 생경해 한동안 친구들을 만날 때면 나는 이 참극을 토로했었다. 아래에서 바라보면 절대로 보이지 않을 일. 가늠할 수 없을 일.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부수는 일, 주택과 주택을 이어주던 골목을 지우는 일, 한 동의 아파트는 이 모든 추억보단 높은 용적률과 높은 건폐율이 중요하다고 열거한다. 당신들은 평당 적정 보상을 받았으니 이 자리, 아니 그만 추억을, 아니, 아니 그만 기억을 들고 가라 한다.


노란 크레인은 이제 하늘을 찌를 듯 내 눈높이를 넘어섰고 이 모든 게 완공되고 나면 아주 소수의 기억도 말끔히 사라지겠지. 그리고 그 반사이익으로 맞은편에 살고 있는 우리 아파트 역시 가격이 뛸 테고 이 자본주의가 정의하는 깨끗한 사람들로 그득 채워지겠지. 그러면 나 역시 그들과 함께 깨끗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가겠지. 표백제만 보이면 제든 다이빙할 준비를 마친 사람처럼.


모든 부모는 자기보다 낫길 바라면서도 이를 이루지 못했을 때 자식이 감당해야 할 무력과 허탈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육십 년대 일인당 국민 소득이 백 달러에 불과했던 한국은 오늘날 삼만 달러에 육박한다. 뽕밭과 허허벌판이었던 이 땅을 눈부시게 발전시킨 세대의 후세대로 나는 태어났다. 어릴 적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외쳤고, 나라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라 배웠다. 조금 더 자랐을 땐 이 모든 게 이데올로기의 잔재라며 폐기처분당했고, 어른들은 내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백구십오억 달러라는 구제금융을 졌을 땐 모두가 가난했지만 적어도 나와 또래들은 가장 행복했다. 자본이 개입될 여지가 없던 우리들의 손에는 동전보다 흙이 많았고 아파트와 아파트를 자유롭게 오갔고 어느 친구 집의 평수가 더 넓은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가난이 주는 슬픔보다 가난과 비교되는 가난이 주는 슬픔이 크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만치 나는 자라나 있었고 이 나라 또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학원에 아이들을 가둬둔 채 몰래 어른들은 대교와 빌딩을 세웠다.


원장은 습관적으로 우리들에게 말했다.


“한 시간만 더 공부하면 미래의 배우자가 바뀐다.”


이 말은 그대로 실현이 되었다. 가끔 그 시절의 원장이 노스트라다무스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면서도 폴란드전의 첫 승과 박지성의 골을 못 본 내 눈을 아직까지 갚아주진 못했다. 일인당 국민 소득이 가파르게 올라갈 동안 나는 여기저기를 전전했고 모두가 일확천금을 꿈꾸지 않을 만큼 가난에서 벗어났을 때, 한 번쯤 일확천금을 손에 쥔 나를 상상했다. 이 역시 가난한 생각이라 나는 가난했고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더욱 가난해졌다.


자본주의는 말한다. 당신이 가난하고 가난한 데에는 오로지 당신, 개인의 책임일 뿐이다. 낡고 너절한 것들은 모두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한다는 발상이 이 나라를 지대하게 발전시켰지만 반대로 우리의 정신은 심대하게 떨어트렸다. 취준생 세 명 중 한 명이 공무원을 준비하는 나라. 연평균 독서율이 한 권인 나라. 성인 40%가 일 년 동안 책 한 권을 안 사는 나라.  


글을 쓰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정작 읽어줄 사람이 줄어드는 나라. 정말로 이상한 나라.


타인의 생각을 들어줄 여유가 없고, 내 기억 내 아픔 내 슬픔을 토로하기 바쁜 우울한 이 나라의 현실. 대화에서 가장 좋은 기술은 화법이 아닌 경청이고, 우리의 마음을 고양시킬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독서일 뿐인데, 칼보다 무섭다는 펜을 든 채 여기저기 휘두른다. 가끔 그 펜은 회검이 되어 찌른다.


나는, 찌른다.


다름 아닌 적은 바로 나라서, 나는 나를 가감이 찌른다. 팔, 다리가 베이지만 결국 나를 죽이는 건 정신이다. 편리함이 주는 안락함의 무서움. 밀도의 공포. 나는 이 이면을 잘 놓친다. 결국 독서 인구의 소멸은 이 나라가 성장한 방식과도 상통한다. 기존의 책보다 새로운 책을 원하게 하고, 그 새로운 책보다 더 새로운 글을 원하게 해서 많은 것이 채 읽히기도 전에 사장되어버린다.


이 역시 사장되겠지.


어느 때보다 많은 글을 쓸 수 있는 시대 속에 살아가지만 누군가가 내 안에 깊이 들어오진 못한다. 나는 가끔 묻는다. 내가 깨끗한지. 아니면 깨끗한 척을 하는 건지. 내 글은 그대론데 거기에 나는 없다. 뽕밭과 허허벌판이었던 이 나라가 발전할 동안, 일인당 국민 소득이 백 달러에서 삼만 달러가 될 동안, 나는 없다. 아니 없었다. 자본주의는 우리, 하고 외치지만 우리 속 나는 없다.


깨끗한 학원, 깨끗한 학교, 깨끗한 지하철, 깨끗한 버스, 깨끗한 건물, 깨끗한 도로, 깨끗한 길, 이 모든 건 내 것이 아니고 여러분 것도 아니고 우리 것이라고 깨끗한 말로 깨끗이 말한다. 깨끗해지면 깨끗해질수록 지워져 가는 나를 발견한다. 깨끗한 면접장, 깨끗한 자기소개, 깨끗한 입술, 깨끗한 배우자, 깨끗한 봉급 뒤로 깨끗한 마음이란 없어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내 방 창가, 고층에서 바라보는 이 풍경이 너무나 생경하다. 점심시간, 식당을 차지한 인부들은 더러운 차림새다. 냄새날 것 같은 모습.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가 나를 키운 방식. 노가다. 손가락이 잘렸지만 죽지 않아 다행이라 말했다. 아주 어렸지만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다행이다, 이 한마디 속엔 자기 자신보다 우리가 들어 있었겠지. 그 한마디 속에서 자라난 나는 단 한 번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킨 적이 없고, 깨끗해져 본 적도 없다.


가장 더러운 아버지는 내게 가장 깨끗해지라며 가르쳤다.


깨끗한 , 깨끗한 피부, 깨끗한 얼굴로 살라고 했다. 가끔 울었지만, 나를 울린 건 아버지가 아니라 나였다. 깨끗한 차를 타고 깨끗한 모습을 한 채 치른 깨끗한 면접에서 나는 깨끗하지 못했고, 자본주의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당신은 학력이 부족하고, 당신은 나이가 들었다. 당신은 노력하지 않아 깨끗하지 않고, 깨끗하지 않아 노력하지 않았다. 일인당 국민 소득이 삼만 달러에 도달할 동안 당신은 깨끗해지지 못했다.


우리는 당신의 부모에게 DDT를 줬고 미군 코코아를 줬고 노동을 줬다. 당신은 당신의 부모 아래 무엇을 배웠는가. 부의 대물림 주장은 부가 아닌 자도 개천에서 용이 난다며 모든 가난한 자를 무색하게 했다. 노동을 해라. 그 말은 곧 노력으로 둔갑했지만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않았다. 부자가 있다면 가난한 자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았다. 가난한 자가 죄는 아니란 사실을 가르치지 않았고, 더러움 속에 비로소 깨끗함도 깃든다는 걸 가르치지 않았다.


더러운 인부들이 세운 아파트에는 곧 깨끗한 사람들로 가득 채워지겠지. 아무도 정의한 적이 없지만 아무도 모르지 않는 사실. 아무도 깨끗하지 않지만 아무도 자신이 더럽다고 믿지 않는 사회. 깨끗하게 자고 깨끗하게 일어나 깨끗한 차로 깨끗한 회사를 가야하고 깨끗한 가정을 꾸려야 깨끗해지는 인생.


내 방 창가, 고층에서 바라보는 이 풍경이 너무나 생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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