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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Sep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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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닌 민지 씨를 반겼다. 

그런 인사가 익숙한지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건넨다.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요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못 와서 죄송해요" 할머니는 민지 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반가움의 표시를 안는 일로 대신한다. 

민지 씨는 익숙한 듯 자리를 잡고 앉는다. 

몇 초간 쭈뼛거리는 사이 할머니는 나를 위아래로 살피기 시작한다. 

"이 친구는 처음 보는 친구인데?" 짧은 말 사이에는 많은 궁금증들이 섞여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민지 씨 친구라고 합니다." 말을 하는 사이 옆에서는 "할머니 제가 이곳에 아무나 데려오지 않는 거 알고 계시죠?" 그 말을 듣고 할머니는 웃어 보인다. 

"그럼 알고 말고, 자네 어서 앉아 뭐 하고 있어, " 그제야 나에게도 활짝 웃어 보이며 주방 안으로 들어간다. 가게 내부를 둘러보자 군데군데서 오래되어 보이는 것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치 이곳이 식당이 아니었더라면 시골에 있는 할머니 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다. 민지 씨의 얼굴에는 편안함이 담겨있다. 

실제로 우리가 만난 게 된다면, 어디까지나 서로의 동의가 있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겠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금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삶과 가상의 삶이 뒤엉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순간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우리 사이를 이어주고 있는 건 아주 얇은 데이터일 뿐이다. 그만큼 가벼운 사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식당의 내부를 둘러보자 메뉴판에는 '백반'이라고만 적혀있고 다른 메뉴는 찾아볼 수가 없다. 언제쯤 식당 관련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는 전문적인 식당일수록 종류는 간소화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괜스레 음식 맛을 기대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온다. 아무런 기대도 생각도 더하지 않을 거라는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 처음 회원정보를 등록하러 가던 날. 담당자가 내게 해주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작성된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매칭 해드린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알고 계시겠지만, 원활한 가상현실 구축을 위해 회원님의 휴대폰 및 개인 sns에 접속할 예정입니다. 그럼으로써 회원님과 상대방의 데이터가 뒤섞인 하나의 가상현실이 만들어집니다. 개인정보 유출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전한 서버를 구축하여 보관하고 있으며 매칭에 성공하시거나 회원 탈퇴를 하시게 된다면 자동으로 정보는 삭제됩니다. 참고로 만들어진 상황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실제에 아주 가까울 정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가끔씩 예민한 회원분들은 그 부분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곤 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만족하고 있다는 평이 자자합니다. 물론 먹고 자고 생리현상을 배출하는 것까지도요. 그러니 접속을 하신 뒤에는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셔야 더욱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과연 데이터 밖 세상에서도 내가 느꼈던 감정의 아주 일부만큼이라도 느끼게 될 수 있을까, 내가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을 떠나 이곳에서 만난 누군가와의 친밀감이 현실에서도 똑같을 수 있을까. 그저 나와 상대방의 기억으로 만들어낸 데이터에 불과할 뿐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뒤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우리의 만남이 잘되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이 식당에 찾아올 생각이다. 물론 식당 할머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면 허탈함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말이다. 민지 씨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부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요? 메뉴판을 뚫어지게 쳐다보시던데, 이 집은 백반 한 가지 메뉴만 해요. 메인 반찬과 국은 매일매일 바뀌기 때문에 자주와도 질리지 않아요. 언제쯤 할머니에게 왜 백반 한 가지 메뉴만 하냐고 물었더니, 잘하는 게 백반이니까. 백반만 하는 거라고, 그 말을 듣고 저와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수긍하고 말았죠. 요즘 세상이 그렇잖아요 잘하는 일 한 가지만으로 먹고살 수 있나요 이것저것 다 잘해도 모자랄 텐데, 그래서 할머니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잘하는 일 그 한 가지만 열심히 해도 충분할 수도 있겠구나, 다 잘하려고 할 필요는 없겠구나 하면서요. 그런데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예요?"

잠시 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뭇거렸다. "오래전 일들이 떠올라서요. 제가 초등학교 삼 학년 때 부모님 사정으로 여름방학 내내 할머니 집에서 보낸 적이 있거든요. 왠지 모르게 이곳에서는 할머니 집 같은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져요. 사실 유난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사람도 많고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뭐랄까, 화려하고 새것 같은 분위기보다 투박하고 오래된 것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더라고요." 민지 씨는 나의 말을 잠자고 듣더니 미소를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자 두 명이 들어온다. 익숙하다는 듯 주방으로 다가가 할머니에게 인사를 한다. 

"어머니 우리 왔어요. 냄새를 맡아보니 오늘은 된장국이네, 맞죠? 제육볶음 냄새도 나고" 주방 안에서 그 말을 듣던 할머니는 큰소리로 웃어 보이며 냄새도 잘 맡는다며 어서 가서 앉으라는 말을 한다. 

그 모습이 정겨워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잠시 뒤 커다란 쟁반에 갖가지 반찬들이 함께 올려져 나온다. 그리고 큰 접시에 양념이 잘된 제육볶음과 뚝배기에 담긴 된장찌개가 함께 나왔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을 외치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덕분에 고기를 먹기에 불편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를 끝 마치고 나오는 길에 민지 씨는 "할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라는 말을 한다. 나는 그 옆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제법 날씨가 선선해진 것 같다. 나오기 전 우리는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가기로 했다. 걸어가는 동안 덕분에 좋은 식당을 알게 되어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민지 씨는 " 네 저도 고마워요! 덕분에 즐거운 저녁식사를 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가는 공원은 자주 가는 곳인가요?" 성인이 된 이후로 혼자 살게 된 나는 여러 번의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를 하며 가장 최우선으로 정한 것은 집 근처에 공원이 존재하는가 이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도 공원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네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고 있어요. 나무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면 이상하게도 복잡하게만 느껴지던 생각들이 정리가 되거든요" 민지 씨는 자신도 그렇다며 맞장구를 친다. 우리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생각들이 자꾸 튀어나오려고 한다. 아무리 괜찮은 상대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맞지 않는 부분은 존재할 것이다. 공원에 가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기우에 불과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딱 그 정도에 불과했을 뿐인지를 알게 되겠지, 

길을 걷는 사이 밤하늘에 떠있는 달이 유난히 밝아 보인다. 사진을 찍으려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 다시 집어넣고 말았다. 현실이었더라면 예쁘다며 사진을 찍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이곳에서의 모습이라 그런지 하나의 세계를 비춰내는 큰 조명에 불과하게 느껴질 뿐이다.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을 해도 상대방과 나에게서 같은 점이 늘어갈수록 나는 더욱더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어내고 있다. 마치 마음에 들지 않은 단 한 가지의 무언가를 발견해내면 '이럴 줄 알았어, '라고 말하며 단번에 프로그램을 종료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일련의 행동들은 임무를 수행할수록 단계별로 올라가듯 하나하나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에 대한 상처는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새롭게 쌓인 기억들 아래 숨겨둔 채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라도 나타나 제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몇 미터 간격을 사이에 두고 가로등은 골목길을 환하게 비춰내고 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골목길의 끝부분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윽고 골목가를 벗어나자 잊고만 있었던 도시의 소음이 다시금 우리 앞에 펼쳐진다. 차량들은 제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듯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 길을 걷는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분주함을 더하며 어딘가로 향해간다. 그런 모습들 틈 속으로 우리는 낯선 이방인이라도 된 듯이 느리게 나아간다. 횡단보도 앞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 신호등의 불은 초록불로 뒤바뀐다. 발걸음을 내딛으려고 하는 순간 먼발치에서부터 큰 경적을 울리며 오토바이가 한대가 빠른 속도로 우리 앞을 지나간다. 재빠르게 민지 씨의 손목을 낚아채자 놀라던 것도 잠시, 나의 품으로 안기고 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우리 둘 모두 당황해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민망하다는 듯 잡았던 손을 두고 멀어져 가던 오토바이를 바라본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뭐가 그리 급하다고 속도를 그렇게 내는지 참" 민지 씨의 얼굴에는 아직도 놀란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마워요. 하마터면 큰일 날뻔했어요" 우리는 신호를 건너기 전 자세에서 멈춘 채로 깜박이던 초록불이 빨간불이 될 때까지 가만히 서있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초록불이 되는 것을 보고 그제야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어때요? 이제 조금 진정된 것 같아요? 오분 정도만 걸어가면 공원이 나올 거예요"

먼발치에 공원의 입구가 보이자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 왔어요."나의 손을 따라 민지 씨의 시선도 공원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다. 다행히도 진정된 듯 표정은 차분해 보인다. 몇 분 전까지 들려오던 수많은 소음들은 또다시 어딘가로 사라져 간다. 분명 같은 도시 안에서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지만 골목길을 걷던 사이 천천히 흘러가던 시간은 수많은 차량들 앞에서 다시 빠르게 흘러갔고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느려져간다. 마치 여러 개의 공간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나와 민지 씨만 그대로인 채로.

입구에서 조금만 더 걸어 들어가면 여러 의자가 보인다. 그중에서 특정 의자에 앉기를 좋아하는데 그 이유라면 큰 나무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다. 낮에는 햇빛을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고 밤에는 큰 나뭇가지 사이로 적당한 빛을 비춘다. 왠지 모르게 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바라보는 모습들은 이따금 밀려오던 외로움의 감정을 어딘가로 다시 흘려보내게 만들어 준다. 아직 아무에게도 이곳을 보여준 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숨겨진 장소는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나와 관련된 누군가에게는 보여준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바람이 불어온다. 옷깃이 흔들리고 머리칼이 흩날린다. 산책을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가족이거나 연인이거나 친구이다.

민지 씨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말한다. "여긴 뭐랄까, 특별하지 않은 곳인데 특별한 곳이네요." 

가만히 바라보자 "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누가 보더라도 화려하고 멋진 장소들에 가면 오히려 공허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어디에서나 손쉽게 찾아볼 수 있고 일상적인 모습들을 담아내는 장소들에서는 안정적인 기분이 들더라고요.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제 자신이 그렇더라고요. 남들에게는 투박해 보일지 모르는 것들이 오히려 투박함이라는 저마다의 가치를 지님으로써 특별함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저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곳들이 특별하게 느껴져요" 겉으로 보이는 것은 상대방의 눈빛이지만 말을 하는 순간에는 눈빛 너머의 감정들이 나에게 깊숙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일지 알 것 같아요. 아마도 제가 공원에 올 때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쉬는 것 과 같은 이유겠죠? 누구나 앉아 쉬어가는 자리겠지만 이곳에 앉게 되면 많은 것들이 달라 보이는 것처럼요"

민지 씨는 나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더하다 이내 먼발치를 바라본다.

분명 보이는 모습은 겉모습일 뿐인데 왠지 모르게 그 안의 모습이 자꾸만 비쳐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분명 외적으로 보기에도 누군가를 손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상대이다. 어디 하나 문제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 속 숨겨진 결함을 찾아내기 위해 애쓰는 일들은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어떤 영문에서 이런 상대가 가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어쩌면 회사 측에서 만들어낸 일이 아닐까? 맞는 상대가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으면 자연스레 흥미를 잃게 될 것이고 그럼 가입자의 수는 계속해서 줄기만 할 테니까. 새로운 가입자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기존 가입자들의 좋은 평이 필요하다. 그렇기 하기 위해서는 이따금 최적의 상대를 연결해야만 한다. 나로서는 운이 좋게 단 두 번 만에 그런 상대가 연결된 것인지도 모른다.'

집중을 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이곳에서 연애를 시작하거나 결혼을 한 사람들은 분명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더라면 가상 데이트 사업은 얼마 가지 않아 망했을지도 모른다.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건 바로 단순한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연애에 있어 '단순함'은 아주 큰 작용을 한다.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호감이 생긴다. 호감은 좋아한다로 바뀐다. 만나고 싶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그 사이에 아주 특이한 방법을 집어넣는다.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호감이 생긴다. '호감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 ,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타당한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인가' 여기서부터 감정은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동안은 이런 이유들을 핑계로 누군가를 만나는 일들을 소모적으로 느꼈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상 데이트라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풀어내기에 아주 조금의 시간을 투자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바보같이 똑같은 감정들을 더해내고 있다.

가상현실 속에서도 머리가 아픈 건 똑같은 것 같다.

마음속으로 혼잣말들을 외쳤다.

' '단순함' , '단순함' , '단순함'. 너에게는 다른 자세는 필요하지 않아 그것 하나면 충분해 잊지 말라고'

민지 씨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우리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서로에 대한 낯섦도 어떤 의심이나 걱정도 더해지지 않은 그런 모습이다그저 지나가는 순간을 바라보며 이따금 눈이 마주치면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순간이 아주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서로에게 전달했다.

시계를 바라보자 어느새 긴 시간이 흘러 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민지 씨를 마주하고 말했다. 민지 씨는 나의 말에 미소를 짓는다. "다시 만나요." 처음 시작은 정해진 상황 속에 던져졌다면 이다음부터는 온전히 나의 의지대로 상황이 흘러간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손쉽게 종료를 시켜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서지 않는다. 공원을 벗어나며 아쉬운 마음에 먼발치를 자꾸만 바라본다. 그 모습은 마치 신기루가 나타나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과 같다. 처음 만났던 장소 앞에 도달하자 민지 씨는 "근처에 주차를 해서 여기서 헤어지면 될 것 같아요. 오늘 고마웠어요 조심히 들어가요" "네 들어가면 연락할게요. 저도 오늘 하루 고마웠어요" 멀어져 가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내 사람들 틈 속으로 사라져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진행을 해야 할까, 중지를 해야 할까. 발걸음은 집으로 향해간다. 모든 것들이 똑같다. 향하는 길에 마주하는 작은 가게까지도. 집으로 들어오자 단 한 가지만 다른 모습이 보인다. 장비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지금 가상현실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평상시와 같이 샤워를 하고 소파에 앉아 메시지를 보냈다. "잘 들어갔어요?" 늦지 않게 답장이 온다. "네 그럼요 덕분에 잘 들어왔어요. 아참 며칠 뒤에 좋아하는 영화가 재개봉을 하던데 우리 함께 보러 가지 않을래요?" 

메시지를 적는 나의 속도가 빨라져 간다. "좋아요, 어디서 볼까요? '자동차 극장'에서 보는 건 어때요?"

그렇게 우리는 삼일 뒤 보자는 약속을 했다.

가상현실 시스템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하며 성능을 향상하고 있다고 했다. 기능 중에서는 '빨리 감기' 기능이 존재한다. '뒤로 감기'기능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했다.

"원하는 시간을 얼마든지 앞으로 당기실 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곳에서의 이틀을 앞당기면 현실에서는 단 두 시간이 당겨질 뿐입니다. 그렇지만 뒤로 감는다고 해서 시간 또한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뒤로 감는 기능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시스템 설정을 누른다. '빨리 감기'버튼을 누르자 당기고자 하는 시간을 설정할 수 있는 표시가 보인다.

나는 삼일을 앞당기기로 했다. 버튼을 누르자 '실행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화면에 뜬다.

몇 가지를 제외하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밤의 어디쯤을 가리키던 시간은 오전의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 날짜는 삼일이 당겨져 있다. 나의 몸상태 역시 삼일을 건너뛴 사람 치고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숙면을 취한 듯 개운한 기분이 든다. 신기함에 거울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을 때 문자 메시지의 알림이 울린다. "오늘 저녁 여섯 시 영화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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