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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재 Oct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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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안 멍하니 민지 씨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바라봤다. 분명 내가 원했기 때문에 며칠의 시간을 앞당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음속 한편에서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차오른다. 당연한 일일까. 시대가 발전했기 때문에 더 이상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들은 불필요한 부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젯밤 헤어지고 오늘 다시 만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설렘의 정도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보고 싶은 마음들을 꾹꾹 눌러 담아 며칠의 시간을 보낸 뒤에 만나는 순간들이 더 클까. 물론, 어제 보고 난 뒤에 하루의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본다고 해서 설렘이 작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며칠의 시간보다 하루의 시간이 설렘의 감정을 증폭시키기에는 충분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마음을 간지럽게 만드는 감정 같을 걸까. 이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나를 만나지 않는 날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그날의 점심은 무엇을 먹었고 하루의 끝이 서로를 향해가고 있는지 조금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색들이 상대방의 색에 물들기를 바라고 있는지 그러니까, 호감이 있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일들이 그립기도 하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바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를 더하거나 삶의 한 부분에 다른 누군가의 삶을 채워 넣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들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런 일들이 쓸모없는 감정 소모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의 마음이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거짓에 기울어 있는지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네 맞아요. 자동차 극장에 가는 거니까. 제차로 이동하시는 게 어때요?" 곧장 답장이 왔다. "네 좋아요" "그럼 제가 데리러 갈게요. 어디쯤에서 만나면 편할 것 같아요?" 알려준 장소를 메모장에 적어둔다. 아직도 시간은 오전의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 자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평상 시라면 회사에 갔을 테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일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 이 부분은 처음 방문을 했던 날 조정이 된 사항이다. 


"상대방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 따른 날짜의 변화, 예를 들어 회사원이라면 평상시의 모습대로 출근을 하고 업무를 보는 등 다양한 것들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단 이런 부분까지 구현시키기 위해서는 업무적인 데이터를 추가로 제출하셔야 합니다. 대부분은 옵션을 선택하지 않지만 간혹 자신이 하는 일을 가상현실 속에서도 느끼고 싶다거나 또는 더 세부적인 짜임새를 원하시는 분들이 있긴 합니다. 옵션사항을 선택하시겠어요?"

가상현실 속에서도 출근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로버트라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우리 회사는 얼마 전부터 수평적인 사내 문화를 조성한다는 이름하에 직급을 모두 없애고 호칭을 정해 부르고 있다. 로버트라는 이름은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주인공이 멋지다나 뭐라나, 그렇기에 자신도 멋진 이름을 써야 한다면서 말이다. 현실에서는 멋지다는 단어와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아무튼 회사를 출근하지 않게 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상시에는 이 시간에 회사에 있지 않았더라면 하고 싶은 목록 리스트를 만들어낼 정도로 회사 밖의 시간에 관심을 갖는 나였지만 그마저도 바람일 뿐, 누구보다 회사일에 앞장서 있을 뿐이다.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자 익숙한 공간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책꽂이에는 여러 권이 꽂혀있다. 그중에 세 권은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책이다. 분명 읽고 싶은 마음에 서점에 달려가 샀던 책들이다. 그중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처음 이 책을 인터넷 어딘가에서 보게 되었을 때 분홍색의 표지는 나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도시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라니, 언젠가는 파리에 가고 싶다고 느껴본다. 누군가 내게 가고 싶은 이유를 물어본다면 나는 확실히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만큼 내가 왜 가고 싶어 졌는지를 잊어버렸다는 게 맞는 건지 어느 특정 순간의 장면 앞에서 불현듯 그런 감정들을 키웠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가고 싶은 이유라기보다 여전히 가고 싶은 마음이 자리 잡아있다는 게 아닐까. 지금의 나로서는 운명적인 사랑에 기대는 타입은 아닌 것 같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운명적인 만남을 꿈꿔왔고 어쩌면 그런 만남을 진행 중이라고 느꼈지만 깨어져버린 관계 앞에서 운명적인 일들은 말 그대로 영화 속 한 장면에 불과할 뿐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줄거리를 마주하던 날.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서점으로 향하고 말았다. 벌써 몇 달 전의 일이다. 이렇게 된 거 민지 씨를 만나기 전에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시계가 오후 네시를 가리켰을 때 마지막 장을 덮게 되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책을 읽은 것 같다. 책을 읽기 전 생각했던 것들과 책을 읽고 난 후의 생각들이 한데 모여 겹쳐있는 기분이다. 두 남녀가 정말 만나게 되었을지는 글을 쓴 작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분명 '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글이 써져 있지만 나로서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그저 허구라는 이름을 빌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펠탑을 실제로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내가 상상하는 도시의 모습 속에는 홀로 있는 나의 존재만이 비쳐 보일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운명적인 것들, 진실과 순수함이라는 단어들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다. 그것은 분명 의도하지 않는 일들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라는 것은 나를 변하게 만든다.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그럼에도 나는 책을 덮자 조금은 그런 감정을 다시 떠올리는 일들을 시작해보고 싶어 졌다. 

때로는 새로운 것들에 다가서는 용기보다 변하지 않는 즉 익숙한 것들을 지켜내는 것에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만약 아주 만약 내 곁에 누군가가 생기는 날이 온다면 그때 내가 읽어본 책을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샤워를 하고 잠시 동안 옷장 앞에서 고민을 했다. 무엇을 입을지는 처음부터 정해두었으면서 막상 입으려고 하니 다른 옷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십 분여를 고민하고 있을 때 문자가 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조금 있으면 뵐 수 있겠어요 조심히 오세요" 답장을 하려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내려두고서 옷을 고르는 일에 집중을 했다. 그리고 정한 옷은 결국 처음에 입기로 했던 옷이다. 

차의 시동을 걸면서 연락을 했다. "그러게요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저 지금 출발해요. 삼십 분 정도 걸린다고 나오는데 아마도 퇴근 시간 즈음에 맞춰질 것 같네요." 창밖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주변의 풍경들이 보인다. 햇빛은 자신의 임무를 다한 것인지 노랗게 물들어가며 질 준비를 하고 있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나오자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처음 이 노래를 알게 된 것은 전 여자 친구 때문이었다. 나를 만날 당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인데 아직은 유명하지 않아서 모를 거라며 내게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 듣는 가수의 이름과 노래였다. 하지만 알게 된 이후로 한동안, 아니 지금까지도 플레이리스트 한편에 자리 잡아 애정 하는 가수로 남게 되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 우스울지 모르지만 나는 노래를 처음 듣자마자 예감을 했었다. 분명 유명해질 것이라는 것을, 라디오 디제이는 참여 가수의 노래가 끝나자 간단한 소개를 이어간다. "젊은 분들 사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가수입니다. 얼마 전에는 상을 받기도 했죠." 디제이의 소개가 끝나자 가수는 말을 이어나간다. "네 안녕하세요. 가수 '잡화점'입니다. 요즘 날씨가 정말 좋은데 제가 가장 애정 하는 노래를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었어요. 저의 데뷔곡 '계절'이라는 노래인데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언제쯤 예명에 대한 질문에 가수는 이런 말을 했다. "잡화점은 말 그대로 잡다한 것들을 파는 곳이잖아요. 때로는 아주 작은 소품이나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까지도 요. 그런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대단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다 손쉽게 들을 수 있고 볼품없어 보일지 모르는 것들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것이 되곤 하는 것처럼. 저 역시 그렇게 되고 싶다는 바람을 더하면서요." 아마도 가수의 진심 어린 인터뷰를 보고 난 뒤로 나는 더욱더 한 사람의 삶을 응원하는 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라디오를 듣는 사이 민지 씨 회사 근처에 다다랐다. 분주하게 건물을 빠져나오는 틈 사이로 민지 씨가 보인다. 나는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민지 씨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그 모습에 나도 웃고 말았다. '나는 지금 보이는 상대방의 외적인 모습에 웃음을 띈 것일까. 그 너머의 담긴 마음에 웃음을 더하는 것일까'라는 의문과 함께,

갑자기는 아니었다. 민지 씨와 대화를 할 때면 드러나는 생각이나 마음에 호감이 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기준, 외적으로 부합하지 않은 상대였더라면 애초부터 깊숙이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점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외적인 모습들보다 내적인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내면을 볼 수 있겠는가, 결국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들일뿐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렇기에 가상 데이트가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모습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누군가들을 위해 물론 나를 포함해서 까지. 그럼에도 의문을 더했던 것은 나를 바라보며 웃는 상대방에게 마음이 요동쳐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일이 더 이상 가볍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에,

민지 씨는 차문을 열고 들어온다. "딱 맞춰 오셨네요. 여기서 자동차 극장까지는 이십 분 정도 걸린다고 해요. 들어가기 전 근처에서 먹을 걸 사서 가는 게 어때요?" 내가 좋다고 대답하자 민지 씨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한다. "그럴 줄 알고 치킨을 미리 시켜두었어요. 팀 회식 때마다 가는 치킨집인데 정말 맛있거든요. 혹시 치킨을 싫어하신다거나, 특히 순살치킨을 싫어하시지는 않겠죠..?" 웃으며 말을 했다. "그럼요. 순살이든 뼈이든 치킨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맛있다고 하시니까 정말 기대되네요." 

"아 저기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가서 좌회전하면 가게가 나와요. 사무실을 나오면서 전화했더니 딱 맞춰 전화했다고 바로 오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치킨집 옆에는 편의점이 함께 있다. 민지 씨가 치킨을 찾으러 가는 사이 나는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먹을거리와 음료를 샀다. 가볍게 봉지를 흔들며 차에 탑승하자 민지 씨는 이미 치킨을 찾아와 앉아있다. 차 안 가득 냄새가 퍼져있다. "와 정말 냄새부터 다른 것 같아요. 빨리 먹고 싶어 지네요" 자동차 극장 입구를 지나 적당한 곳에 주차를 했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기다렸다. 아직 오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다. 이천 년대 초에 개봉했던 영화지만 재개봉 바람이 불면서 다시 한번 상영을 하는 영화이다. "민지 씨도 이영화를 보셨다고 했었죠? 저는 몇 년 전에 처음 영화를 접하고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네 저도 몇 년 전 처음으로 영화를 접하고 영화관에서 볼 수 없다는 게 정말 아쉬웠는데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영화가 시작하자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중반부쯤 흘러 있을 때 민지 씨를 살짝 바라보자 흐뭇한 미소를 띠며 영화를 보고 있다. 내가 바라보았단 것을 들킬까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집중을 했다. 영화가 끝나자 민지 씨의 표정은 행복함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민지 씨는 먼저 말을 꺼낸다. "여기서 조금만 더 차를 타고 가면 호수공원이 나와요. 우리 산책하지 않을래요?" 나는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공원의 이름을 네비에 찍고 출발을 했다. 오분도 채 되지 않는 사이 공원의 초입에 도착을 하고 근처에 주차를 했다. 차에서 내리자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진다. 민지 씨는 몇 발자국을 걷더니 "어때요? 뜬금없을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내면의 모습에 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잠시 동안 머뭇거리자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사실상 지금 우리의 모습은 영원한 게 아니잖아요. 자연스럽게 늙게 될 것이고 어느 순간에는 재가되어 사라지겠죠.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영원하다고 생각해요. 마음은 늙지 않아요. 언제까지라도 지켜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그러더라고요 마음도 마찬가지로 영원하지 않다고 언젠가는 변하기 마련이고 잊힐 뿐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건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말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 내면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말 그대로 보이는 부분들뿐이잖아요. 본심을 숨긴 채로  깎고 다듬어서 예쁘게 포장해버린다면 누구든 혹하지 않을까요?"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른다. "그렇지만 아무리 예쁘게 포장된 것들이라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마음이겠죠? 그리고 내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포장된 너머의 것들을 알아볼 수도 있겠죠.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지만 아직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 그럼 민지 씨가 온전히 내면을 볼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요?" 

"이건 저와 친한 친구들 몇몇만 알고 있을 뿐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이야긴데요. 아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냥 편하게 들으세요." 이야기를 본견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는 적당한 의자에 앉았다. "제가 초등학교 이 학년 때의 일이에요.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부모님은 저를 대리고 처음 제주도에 가는 여행이었기 때문에 떠나기 며칠 전부터 어딜 가나 늘 자신들 곁에 붙어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을 귀가 아플 정도로 듣기도 했고요. 우리 가족은 제주도의 어느 시골마을의 집을 빌려서 일주일 정도 묵기로 했어요. 지금 생각해봐도 그 집은 오래되었지만 아주 예쁜 집이었어요. 지금은 아쉽게도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펜션이 생겼지만요.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부모님과 집 근처 작은 해변에서 수영을 하고 낮잠을 자기 위해 다시 집으로 들어왔을 때였어요. 그날은 제주도에 온 지 사일째 되는 날이었어요. 저는 당연히 금세 잠에 들고 말았고 부모님은 저를 재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찬가지로 낮잠을 자기 시작했어요. 평상 시라면 저녁 늦게까지 잠에 들어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얼마 가지 않아 잠에서 깨고 말았어요. 눈을 떠보니 두 분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해변을 가면서 보았던 새끼 강아지의 모습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이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했던 일들을 무시한 채 강아지를 보러 가야겠다!라는 마음 하나로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집을 나섰죠. 신발을 신는 순간까지도 두 분은 여전히 잠에 빠져있었고요. 그렇게 무작정 걷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부모님과 함께 걸었던 그 길을 혼자서 걸으니 다르게 느껴지더라고요. 분명 가까운 거리에 강아지를 키우는 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걸어도 걸어도 보이지가 않으니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 수영을 했던 해변까지 나가게 되었어요.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법도 한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해변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어요. 그러다 아무 생각 없이 또 걷기 시작하다가 다람쥐 한 마리를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에 다람쥐를 불렀더니 재빠르게 근처의 숲 속으로 들어가 버리더라고요. 저 역시 다람쥐를 따라 숲으로 들어가고 말았죠. 앞서가는 다람쥐를 계속 부르면서요. 더 이상 다람쥐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아쉽게도 놓치고 말았구나,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저는 길을 잃어버린 뒤였어요. 그 순간 부모님이 여행을 떠나기 전 계속해서 하던 말들이 떠오르고 겁이 나 눈물이 나더라고요. 근처에 있던 돌바위에 앉아 한참을 울었던 것 같아요. 더 이상 울 힘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시골의 밤은 금방 어두워졌어요. 그러니 더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는 일이 저에겐 최선일뿐이었죠. 그땐 바보 같지만 엄마 아빠가 저를 찾게 되면 나는 정말 많이 혼내겠구나라는 생각밖에 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저의 어깨를 툭하고 치더라고요. 깜짝 놀라 멈췄던 울음을 터트렸더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들려오더라고요. 뒤돌아보니 마을에 도착한 첫날. 마주한 사람이었어요. 행색도 초라해 보였고 몸이 불편한지 걷는 걸음도 힘들어 보이더라고요. 그분은 우리 가족을 보더니 힘겨운 손짓을 더하며 인사를 했지만 부모님은 겉으로 인사를 했을 뿐, 곧바로 저를 보며 저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을 했어요.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제가 말한 것처럼 행색이 초라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그 말을 듣고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은 채로 아,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구나 조심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요. 그런 사람을 길을 잃어버린 곳에서 만났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그분이 저를 보고 손짓을 하는데 저는 놀라 뒷걸음질 쳤죠. 그러니까 그분은 당황을 하며 손사례를 치더라고요. 아마도 자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곤 재빠르게 오른쪽 주머니에 무언가를 꺼내 재게 내밀더라고요. 초콜릿이었어요. 참 웃긴 게 뭔 줄 알아요? 그렇게 무섭다고 생각했으면서 초콜릿을 보자마자 곧장 경계심을 풀고 다가가 받았어요. 그리고 고개를 한번 숙여 인사를 하고는 곧장 초콜릿 포장을 뜯어 입안에 넣었죠. 정말 달콤했어요.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진정이 된 저를 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가는데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이해를 할 수가 없었어요. 계속 손짓을 통해 먼 곳을 가리키기만 하면서요. 저는 그분에게 말했죠 "아저씨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에요?" 처음보다 더 강하게 손사례를 치더라고요. 그리고 아주 힘겹게 "아니에요 집에 가요 데려다 줄게요"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듣고 물끄러미 쳐다보니까. "집, 집, 집에 가요"라는 말을 반복해서 뱉더니 한 발자국 떼며 앞장서 나아가더라고요. 그리곤 몇 발자국 걷다 뒤돌아 저를 보더니 따라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계속해서 길을 나아갔어요. 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뒤에서 따라 걸었어요. 몇십 분을 걸었을까요. 익숙한 해변이 보이고 이내 마을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죠. 저를 발견한 것은 우리에게 집을 빌려준 동네 아저씨였어요. 곧바로 큰 목소리로 말하더라고요 "민지를 찾았어요! 여기 민지가 왔어요!" 얼마나 목소리가 크던지 순식간에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죠. 그 틈 사이에는 부모님도 함께 있었어요. 저를 발견하자마자 엄마는 눈물을 터트리고 아빠는 어디 갔었냐며 "걱정했잖아"라는 말을 하면서 꽉 끌어안더라고요. 저를 이곳까지 데려다주신 분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었고요. 아빠는 안고 있던 저를 살며시 내려놓고 곧장 그 아저씨에게 다가가더니 "당신이 우리 아이를 데려갔어? 경찰서 가자고. 이대로 안 넘어갈 줄 알아" 아빠의 말을 듣자마자 아저씨 앞으로 다가가 작은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죠. "아빠 뭐라고 하지 마. 내가 길을 잃어서 여기까지 나를 대려 주신 분이야 고마운 사람이라고. 엄마 아빠가 그랬잖아 누군가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도와주는 사람은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자 이것 봐 나한테 초콜릿도 줬단 말이야" 아빠는 제말을 듣더니 바로 고개를 숙여 사과를 했어요. 자신이 몰랐다면서, 정말 미안하다고. 아저씨는 하나도 불쾌해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럴 수 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죠. 다음 날 저녁 우리 가족은 동네 사람들을 집에 초대했어요. 다들 저를 찾느라 고생했다면서 대접을 하고 싶다고. 나중에 들어보니 그 당시에는 씨씨티비도 보급화 되어있지 않았고 핸드폰도 없던 상태라 꽤나 고생들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그 아저씨도 함께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엄마 아빠는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다시 한번 사과를 하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어요. 아저씨는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칠 뿐이었어요. "제 이야기가 너무 길었죠? 미안해요"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야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서요? 마지막은 어떻게 되었어요? "아, 일주일을 잘 보내고 왔어요. 그 사건을 계기로 저는 절대 겉모습을 보고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게 되었고요. 그리고 지금도 일 년에 한 번씩은 제주도에 가곤 하는데 그때마다 아저씨를 찾아뵈러 가요. 지금은 할아버지가 된 분을요." 민지 씨의 눈은 빛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회상하는 눈빛이며 사람에 대한 마음이자 진실되고 순수한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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