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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세살이 Jan 09. 2019

공무원 그만두고 여행중인 30대의 성찰기, 알바니아편1

어린 시절부터 나는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학창시절 내내 공부 이외의 것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모범생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나갔다.


가족, 학교, 사회와 같은

나를 둘러싼 공동체들은

규칙과 제도에 순응하는 학생들을 우대했다.

나는 그들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가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나에게 주어진 일들에 매진했다.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순전히 내가 원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모님을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의무감,

좋은 모습만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 같은 것들이

더 크게 작용했다.


나에게 기대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실망하는 일들이 발생할까봐 두려웠다.


직장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런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나

내 나이대의 사회인이 갖추어야 할

경제적 조건처럼,

외부로부터 주어진 목표들을

추가로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했다.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나를 완벽에 가까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역할을 완전무결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의 선택과 결정에는

오류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완벽한 사람일리 없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기대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하는 일들이 잘못되는 경우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실패가 두려웠다.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고 싶지 않았다.


남을 실망시키지 않고 싶다는 마음은

내 자신에 대한 일종의 결벽증으로 전염되어

스스로를 옭아매고 짓눌렀다.     


15개월간의 여행은 이런 부담감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여행은 나에게 시간의 여유, 충분한 휴식,

새로운 자극 등도 선사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좀 더 너그럽게 바라보게 했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 속 어떤 것도

완벽한 것은 없었다.

내가 방문한 어떤 여행지도 완벽하지 않았다.

모든 여행지에는 만족과 실망이 공존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행지를 선택한 나를

책망할 필요도 없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부담감을 내려놓고, 결과를 받아들이고,

또 새롭게 도전하면 그만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닫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와 아내는 알바니아의 블로러(Vlore)라는

해안도시에서 한 달을 머무르기로 했다.


신뢰성 있는 정보들이 워낙 없었던 탓에

알바니아 여행길은 무척 불안하고 고생스러웠다.

버스 노선이나 운행 시간표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우선 마케도니아를 떠나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Tirana)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할 수 있었던 최대한 빠른 시각에

티라나에 도착했지만,

블로러로 가는 마지막 버스가

한 시간 전에 떠난 후였다.


이미 짙은 어둠이 가득한,

계획에 없었던 낯선 도시에서 꼼짝없이

하룻밤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버스 시간표를 좀 더

철저히 알아보고 왔어야 하는 건데...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묵기로 한

블로러의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내가 차마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방식으로 상황이 풀리기 시작했다.


호스트는 지금 일 때문에

블로러에서 티라나로 택시를 타고 오고 있는데,

다시 블로러로 돌아갈 예정인 이 택시를

우리가 이용해도 될 거라고 알려 주었다.

서울에서 대전 정도의 거리를 택시로 이동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30분 후에 우리는 극적으로 호스트를 만났고,

3만 원 정도의 가격에

택시를 타고 블로러로 향했다.


택시기사 청년은 밝은 표정으로

어린 딸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분유 값이 너무 비싸

주말에 택시 운전을 한다는 말을 할 때는

근심과 걱정을 비췄다.


비록 버스를 타지는 못했지만,

그 덕에 우리는

몇 개의 독특한 추억을 더할 수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 도착한 블로러라는 도시는

새카만 어둠과 사정없이 쏟아지는 폭우로

우리를 맞이했다.


우리가 머무를 숙소는

바닷가 바로 앞이었지만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육지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호스트의 어머니를 만나서 숙소에 들어와

겨우 한 숨 돌릴 수 있었지만

밖에서 매섭게 들려오는 천둥과 번개 소리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어렵게 잠을 청했다.

우리의 알바니아 여행은 과연 잘 될 수 있을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빗소리나 천둥번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집 밖으로 나가니 눈앞에 푸른 바다가 가득했다.


12월의 알바니아는 온화해서

얇은 외투 정도만 걸치면 될 정도로 따뜻했다.

해변의 산책로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서

바다를 보며 걷기에 좋았다.

진하고 맛있는 커피를 천 원에 마실 수 있었고,

푸짐한 해산물 파스타를 7천 원에 먹을 수 있었다.

외국 바닷가에서의 한 달 살기라는

로망이 실현되어 가는 순간들이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블로러에서의 여행을

바퀴벌레가 흠집 낼 줄 누가 알았을까.

시도 때도 없이 숙소 이곳저곳에서 출몰해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바퀴벌레들 때문에

숙소에 머무는 것이 점점 공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남은 일정을 환불 받고

10일간 머물렀던 블로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여행 8개월 만에 겪은 최초의 일이었다.


처음 여행을 시작했을 때 내가 방문할 곳들은

동화 속 세상처럼 행복만이 가득할 것 같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바퀴벌레 같은 불행만이

가득하지도 않았다.

모든 곳에는 행복과 시련이 공존했다.       



블로러를 떠나야 했지만

아직까지 알바니아의 바다와는

작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사란더(Sarande)라는

알바니아의 또 다른 해안도시에서

20일 가량을 머물기로 했다.

다음 여행지로 계획한 그리스와

가깝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려는 버스를

필사적으로 멈춰 세워

겨우 사란더로 향할 수 있었다.


우당탕탕 어쩌다보니 결정된 사란더행이었지만,

그 여정에서 나는 평생 절대 잊지 못할

해안도로를 달리는 경험을 했다.


교통 인프라가 발달하지 않은

알바니아의 경제적 상황이

역설적으로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아직까지 보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높은 산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그재그로 오르내리는,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해안도로에서

차창 밖으로 가득한 알바니아의 아드리아해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가끔 도로를 가로막고 있는 소와 양들을 향해

운전기사는 경적을 울렸다.

버스에서 만난,

사슴을 닮은 초록빛 눈의 청년은

우리를 위해 통역을 해주고

휴게소에서 커피를 사줬다.


사란더에 도착하자

에어비앤비 숙소의 호스트 부부가 마중을 나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마치 과자 웨하스를 닮은 건물들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은

사란더의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바다가 보이고 햇살이 들어오는

사란더의 숙소에는 바퀴벌레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또다시 모든 것이 좋을 수는 없었다.

우리가 사란더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일주일 내내 세찬 비가 내렸다.


멋모르고 나갔다가 몰아치는 바람에

우산이 부러지고 우비가 찢어진 이후로

우리는 비가 그칠 때까지

숙소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알바니아에서 머무른 한 달 동안

실컷 바다를 보았다.

아내와 함께 해안을 걷고,

바닷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저 멀리 보이는 이름 모를 섬에

누가 살고 있을지 상상하고,

항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배들이

내일은 어떤 곳을 향해 항해할지 궁금해 했다.

해가 뜨는 날이면 온화했지만

그래도 바닷물은 차가웠는데,

그 속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을 보며 활력을 느꼈다.     


그러나 바다는 지루하기도 했다.

매일같이 봐도 바다는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온갖 나뭇가지와 쓰레기들이 바닷가에 쌓였다.

파도에 밀려온 커다란 나무토막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허무하고 쓸쓸해졌다.

숙소에서 볼 수 있었던

커다랗고 단단한 빨래집게들은

바닷가에서의 삶이 만만치 않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바다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어떤 절대자가 선의만을 가지고 만든 것은 없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나 역시도 완벽할 수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부분이

다른 사람을 실망시킬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내 자신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기보다는

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스스로에게 좀 더 너그러워져야겠다.

누군가를 실망시킬까봐 두려워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이끌면서 해보고 싶은 것들에

과감하게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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