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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신장 기능이 30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by 글쓰는 권모니

아빠의 신장 기능이 30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본가 소파에 널브러져 저녁상을 기다리다 이 소식을 들었다. 몸을 일으켜 부엌 쪽을 내다보니 아빠가 데워진 청국장을 그릇에 옮겨 담고 있다. 요즘 식단 관리를 위해 직접 삼시세끼를 해 먹는다며, 본인이 만든 무염 청국장과 김치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어어, 하며 어색하게 일어나 상차림을 돕는다.


“그래도 3기에서 8년이나 버텼네. 4기는 얼마나 버티려고?”

“10년이 목표야. 10년만 더 살면 죽어도 될 것 같아.”


으응 그렇구나. 원래 같았으면 이식 수술을 준비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아저씨의 솔직한 즉답에 나는 겸연쩍어졌다. 아빠가 차린 저녁상에는 정말로 한 톨의 염분기가 없었다. 나는 콩 비린내가 나는 청국장과 고춧가루 홧홧한 김치를 먹으며 이 대화가 오랫동안 남을 것이라 직감한다.



아빠는 8년 전 만성 신부전을 진단받았다. 신장은 한 번 부전의 사이클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비가역적으로 나빠진다. 당시 아빠의 신기능은 보통 사람의 절반 수준으로 3기에 속했다. 8년이 지난 지금은 신기능이 3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하니 일 년에 2.5퍼센트씩 신장이 죽어간 셈이다. 신장 기능이 30퍼센트 미만이 되면 4기, 15퍼센트 미만이 되면 말기 환자로 분류되어 평생 주 2-3회 투석을 해야 한다. 생활 습관과 기저 질환에 따라 반의반 조각 남짓 한 신장을 데리고 몇 년을 더 버틸 수도, 조만간 신장이식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그날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아빠 입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이 나온 이후 나는 한 번 씩 아빠가 없는 10년 후를 상상해 본다.


글쎄, 가장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조급함이다. 아빠가 없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허둥지둥해 당장이라도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일었다. 투석에 메이기 전 가고 싶어 했던 장기 해외여행이라던가, 굳이 나가 살아야겠냐며 본가에 들어오라고 아쉬워했던 얼굴이 생생히 바로 섰다. 조금 더 자주 봤어야 했는데, 조금 더 살뜰하게 챙겼어야 했는데. 가다듬지 못하고 내뱉었던 말들과, 마음만큼 하지 못한 말들이 그 뒤로 딸려 왔다.


그렇게 생각하면 신장 기능이 30퍼센트나 남은, 투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아빠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지금껏 표현하지 못한 시간을 통렬히 뉘우치며 당장 여행 일정을 잡고 본가로 들어가 사랑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쏟아내야 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참 쉬웠을 것이다.


몸은 선뜻 움직여지지 않는다. 조급함에 사랑을 쏟아 놓고 나면 억울함이 반작용으로 따라붙었다. 나는 가상의 아빠에게 사랑하고 고맙다고 퍼부어 놓고, 이번엔 반대편으로 돌려 세워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아빠는 죽기 전에 후회 되는 게 없어? 가족한테 하고 싶은 말은 없는 거야? 먼저 떠나면 이 생의 것들은 의미가 없으니 혼자 마음 편하면 됐다 이거야? 설마, 아쉬운 사람이 먼저 손 내밀기를 기다리는 거야?


살아온 모든 시간 동안 아빠를 사랑했고, 절반은 미워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긴 시간 동안 세를 겨루다 이제야 힘이 빠져 적당한 휴전선을 그은 참이다. 결국 나는 덜걱거리는 마음을 안고 가만히 멈춘다. 아빠와 관련된 그 모든 감정의 균형점을 간신히 밟고 선 때가 지금이라서. 아빠와 손 잡고 정신과에 달려가 24개월 104주 동안 일주일에 한 시간 씩 묵은 감정을 싸그리 끄집어내어 빡빡 씻고 닦을 것이 아니라면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우두커니 서 있기로 했다. 언젠가 찾아올 후회를 기다리면서. (2024.01.25)



* 에세이는 매주 금요일 업로드 됩니다.

*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이야기는 블로그, 권모니 글방 에서 떠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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