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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랑 알러지 체질입니다

by 글쓰는 권모니

이십 대 중반의 일이다. 그때 나는 어떤 남자애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 애는 알면 알수록 장점뿐이었다. 성격도 비슷하고, 공유하는 취향도 겹쳤으며, 알고 보니 대학 동문이기까지. 이 넓은 우주에서,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걸로 모자라 같은 대학을 졸업한 끝에 결국 이렇게 만나 친해져 버린 너와 나… 우리는 서로 결국 만나야 하는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되겠지… 벅차오른 나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불쑥 말했다.


“과장님, 저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외근지에서 사무실로 복귀하던 박 과장은 고개를 홱 돌려 우수에 젖은 나를 쳐다봤다. 몇 초간 조수석을 바라보던 그녀는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고 침착하게 말했다.


“빨리 썸남 한 명 더 만들어.”


“…벌써 데이트 신청했는데요.”


그녀의 고개가 다시 내 쪽으로 홱 돌아왔다. 뒤늦게 사건 발생 경위를 보고받은 그녀는 곧 깨달았던 것 같다. 이 짝사랑은 망했구나. 하지만 이 어린 양은 앞으로 누군가에게 반할 날이 창창해 보였고... 박 과장은 인생 선배로서 어떤 책임감을 느꼈다. 반포대로의 정체도 해소될 기미가 없자, 그녀는 한 사람의 인생을 구제하고자 그녀의 사랑 노하우를 길고 자세하게 전수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당시 나는 매우 위중한 상태였기에 별로 기억나는 건 없다. 그 애랑 만날 다음 구실을 고민하느라 박 과장의 조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다.


당연히, 그 해 좋아하던 남자애랑은 잘 안됐다.






마음을 적당히 표현하는 일은 항상 어려웠다. 나는 꽂히면 우선 저지르고 보는 인간형으로, 사회적 언어로 ‘추진력이 있다’고 표현하고, 가족들이 쓰는 말로는 ‘승질이 급하다’. 호기심의 방향으로 와락 뛰어드는 내 성향을 일찌감치 파악한 박 과장은 앞으로의 일을 예견하며 마음 조절의 실전 지침을 알려준 셈이다. 좋아하던 남자애랑 어그러지고 나서는 실제로 그녀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려 노력도 해봤다. 하지만 언제나 상대가 좋아지는 속도가 다른 썸남을 만드는 속도보다 월등히 앞섰고… 나는 역시 생겨 먹은 대로 살아야 하나 봐, 하며 나 좋을 대로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마음의 크기 조절이라는 게 사귀기 전 단계에서만 중요하다면 일이 이렇게 커지지는 않았을 테다. 누군가와 주파수가 맞아 연인이 된다면, 그다음 단계는 더 까다롭고 미묘하다. 애인이 너무 사랑스러워 불타는 마음에 장작을 몽창 넣으면 ‘스무살이야 뭐야…’라는 당황스러운 눈빛을 받을 수 있고,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어 마음을 꾹꾹 눌러 아끼다 보면 상대방은 네가 날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며 지쳐 떠날 수 있다. 원하는 만큼 표현하고 상대가 부담 느끼게 하기 vs 표현을 아끼고 아껴서 상대를 지치게 만들기. 이 밸런스 게임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전자를 골랐다. 미련 없이 사랑하는 쪽이 더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뿔싸. 세상에는 받는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인간도 있었다. 세상에 이딴 새끼도 존재하는구나, 큰 깨달음을 얻고 열받아서 게임 판은 엎어버렸다. 어떤 매력적인 사람도 나보다 소중하진 않다.






도대체 적정한 마음의 크기라는 건 뭘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로 길고 오래 타오르는 애틋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해답을 찾고 싶어 내 알고리즘 밖에서 연애 전문가를 모셔 와 한동안 열렬히 시청했다. 거의 백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그 유튜버는 말했다.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랑은 잘 될 수가 없다. 특히, 결혼은 덜 좋아하는 사람과 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의 삶을 지켜가며 은은하게 오래 사랑할 수 있다. 그러니, 마음을 조절하는 데에는 방법이 없는 거다. 적당한 마음을 줄 만큼의 적당한 상대를 잘 고르는 전략이 있을 뿐.


머리로는 이해가 갔다. 사람의 심리라는 건 그렇게 생겨 먹었고, 하필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고. 그 둘의 궁합은 개 똥이구나. 내가 지향하는 관계를 구축하려면 정신줄을 붙잡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가장 비이성적으로 하고 싶은 사랑을 판단력까지 써 가며 운용하기엔 머리가 아팠다. 모든 걸 감수하고 에라 모르겠다 뛰어들 맷집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좋아한다’의 기준을 아주아주 높이 올려놓는 쪽을 택했다.


예를 들어, 조금 괜찮아 보이는 남자애가 있다? 우선 빠르게 내 뺨을 갈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 애가 별로인 이유를 찾는다. 수저통 옆에 털썩 앉아 가만히 있다든지, 개인톡은 하면서 단톡방은 안 읽는다든지, 애매하게 최신 감수성 장착 못 한 발언을 한다든지. 마더 테레사도 통과하지 못할 꼼꼼한 검열 끝에 나는 그 애의 꼬투리를 찾고야 말고, 그제야 안정을 찾는다. 짜식, 너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은 게 까불어. 그다음부터는 많은 게 쉬워진다.





사랑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며 한 발짝 물러나 있는 나를 보는 주변 반응은 다양하다. 공감하고 이해해 주며 위로해 주는 사람. 회피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으니 후회하지 말고, 젊을 때 여럿 만나보라는 사람. 노력하지 않아도 인연을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바뀔 거라는 사람. 어떤 마음으로 하는 말인지 알아서 나는 모두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준다.


알러지의 일차 치료는 회피다. 사랑해, 라는 말을 접어두고 살아도 이미 삶은 엉키고 부서지고 매만질 부분투성이다. 언젠가 가볍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내 온도에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날까? 퍼주고 퍼 줘도 아깝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기 전 이런 질문이 가끔은 뇌리를 스치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크게 궁금하지가 않다. 누구 말마따나 언젠가 때가 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 뭐, 어쨌든 오늘은 그냥 잘 자고 싶을 뿐이다. (2025.03.17)



* 에세이는 매주 금요일 업로드 됩니다.

*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이야기는 블로그, 권모니 글방 에서 떠듭니다.

* 소식은 인스타그램과 스레드, @writer.moni 에서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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