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을 버티면 와인 맥주를 준다
22년 하반기 꿈에 그리던 글로벌 기업에 입사했다. 입사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실제로 나는 말하는 감자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 1년차가 되었다. 1년은 짧아 보이지만 이제 회사의 분위기와 돌아가는 상황은 모두 파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이 회사를 몇 년이나 더 다닐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단계였다.
역시 이를 모를 리 없는 인사팀도 적절한 타이밍에 파란피 주입을 시도했다. '원페스타(OneFesta)'라는 입사 1년차 축하 행사 초대장이 날아온 것이다. '그래봤자 이미 알 거 다 아는데, 기대도 안 된다'는 마음으로 동기들과 원페스타 행사 장소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우려와 다르게 너무나도 잘 포장해 둔 삼성인의 행사에서 세상 누구보다도 재미있게 동기들과 놀고 왔다. 잔뼈가 굵은 인사팀 입장에선 한 번 파란피에 속은 사람, 두 번을 못 속이랴. 열심히 SAMSUNG이 적힌 슬로건을 내밀며 사진을 찍고 또 한 번 우리들만의 파티에 취해버렸다. '어쨌든 입사 1년차는 인생에 한 번뿐인데!'라고 애써 변명하며 이 날의 추억거리를 적어보려고 한다.
회사 잘알 Quiz
이름 그대로 회사에 대한 Quiz가 쏟아졌다. 처음 사업을 시작한 연월일부터 오늘 참여한 사람은 총 몇 명인지 등 운에 맡겨야 하는 문제들만 줄줄이 나왔다. 1등은 아예 넘볼 수 없는 등수였고 퀴즈 중후반이 되자 겨우 101등에 안착했다. 그런데 이때, 100등도 상품을 주겠다는 MC의 말에 '어머 이거 되겠는데?' 하면서 100등 굳히기에 들어갔다. 정답을 체크하기까지 걸린 시간도 순위 변동에 영향을 줬다. 그래서 100등을 유지하고자 급기야 아는 문제도 천천히 정답을 맞히며 속도 조절을 했다. 맨 마지막 문제에서 충분히 늦게 정답을 제출했지만, 아쉽게도 등수가 조금 올라가서 최종 97등이 되었다. 결국 상품을 받진 못했지만 이때부터 이미 슬슬 흥이 올랐다.
캐리커쳐
이미 하루 전에 다녀온 동기들의 꿀팁을 들었기 때문에, 점심밥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캐리커쳐 부스에 캐치테이블처럼 순서를 걸어두는 것이었다. 듣기로는 나 혼자 산다 프로그램에서 이찬혁이 엄마와 연남동 데이트에서 갔었던 캐리커쳐 그려주는 샵이라고 한다. 가보니 이미 다른 동기들도 줄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행사 기획자들이 MZ 마음 제대로 읽었네'라고 생각했다.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가 보니 5분도 안되어 캐리커처를 쓱싹 그려주셨다. 보통 희화화를 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현실보다 오백배는 예쁘게 그려주셔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반쪽: 동의할 수 없다. 실물이 오백배 더 예쁘다.) 한껏 신나 SNS에 올리자 DM으로 요즘 여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가봤다는 얘기도 들었다. 뭔가 모를 뿌듯함도 느끼고 이걸 회사에서 누리다니 파란피가 약간 차오르는 것 같았다.
사업부장님과의 시간
점심 먹고 사업부장님을 초청하여 축사와 게임을 진행한 세션도 있었다. 대체 누구 아이디어였을까. 사업부장님께 밸런스 문제를 내고 우리는 사업부장님의 선택과 동일하게 체크하면 승점을 얻는 게임이었다. 밸런스 문제의 예시는 다음과 같았다.
3시간 동안 회의에서 발표하기 vs 3시간 동안 상사의 발표 듣기
일은 잘하는데 차가운 신입 사원 vs 일은 좀 못해도 성격 좋은 신입 사원
나 빼고 다 잘나서 주눅 들어야 하는 부서 vs 내가 제일 잘나서 인정받지만 소처럼 일해야 하는 부서
64년생의 사업부장님은 밸런스 게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셨다. 하나씩 여쭤볼 때마다 "왜 골라야 하냐", "이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를 시전하시며 겨우 골라주셨다. MC들도 당황하면서 사업부장님은 MBTI 중에 S(현실형)가 틀림이 없다며 어렵게 진행을 이어나갔다. 사업부장님 앞에서 진지한 직원의 모습을 보였어야 하는데.. 너무 웃겨서 정말 깔깔댔다.
마지막으로 1년 차에게 한 마디 부탁드린다는 MC의 진행에, "전문가가 되세요. 그게 여러분이 살 길입니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정말 공감하는 바이다. 그리고 전문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회사인 것도 인정한다. 올 해만 교육을 20일 이상 갔지만 앞으로도 배울 내용이 산더미다. '그래, 앞으로도 회사에서 얻을 것만 생각하면서 버텨야지'라는 마음이 잠깐 들었다.
오케스트라&뮤지컬앙상블 콘서트
진짜 기대가 없었다. 밥 먹고 딱 자라고 만들어준 세션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세션이 되어버렸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오케스트라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셨는데, 듣는 내내 너무 행복했다.
Frank Sinatra - New York, New York
Billy Jeol - New York State of Mind
Nat King Cole - 재즈 L.O.V.E
영화 알라딘 - A Whole New World
영화 위대한 쇼맨 - Rewrite The Stars
뮤지컬 Rent - Seasons of Love
영화 위대한 쇼맨 - This Is Me
특히 재즈 L.O.V.E는 내 최애로 등극했다. 이 노래는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분명히 들어본 유명한 노래였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제목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 디오랑 악뮤 수현이 듀엣으로 불러서 한참 빠져있었던 Rewrite The Stars도 불러주셔서 너무 좋았다. 그리고 뮤지컬 Rent의 주제곡인 Seasons of Love가 너무 좋았어서 나중에 꼭 뮤지컬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외에도 첫 돌 컨셉의 인생네컷, 베스트 드레서 선발, 스무고개로 우리 부서장님 찾기, 작가님 강연 등의 세션이 있었다. 너무나도 알찬 구성에 동기들과 함박웃음 지으며 즐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마지막에 레디백이랑 와인까지 챙겨주니 회사 스트레스가 눈 녹듯이 사라지고, 5%도 안되던 파란피도 약 50%까지는 다시 채워진 것 같았다. 지금까지 1년 동안 적응하랴 일 배우랴 고생한 나 자신, 레디백도 생겼으니 조만간 여행을 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