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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램지 통삼겹 오븐구이

nice and crispy 한 직장인의 주말

by 클루

어느 나른한 토요일 오전, 주중에 쌓인 피로로 느지막이 일어난 평범한 날이었다. 어제까지는 폭풍 같은 회사 일에 치였지만, 만 3년 차의 나는 뒤만 돌아보면 회사를 잊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이 날은 우리 집에 오븐을 들인 기념으로 기분을 낼 만한 첫 요리를 물색하고 있었다. 갑자기 짝꿍이 예전부터 해보고 싶은 요리가 있다며 고든램지 통삼겹 오븐구이 영상을 보내줬다.



https://youtu.be/9biIOtEYeHc?si=pEh4XtfVE94lUBN_

How To Make Slow Roasted Pork Belly | Gordon Ramsay


썩 내키지 않았지만 너무 기대감에 차있는 눈빛을 모른척할 수가 없었다. 대학생 시절 자취할 때 에어프라이어에 수많은 통삼겹을 구워봤기 때문에 무슨 차이가 있으려나 싶었다. 하지만 오븐을 기름칠할 좋은 요리인 것 같아 내심 기대가 되었다. 신난 짝꿍은 고든램지 영상과 육식맨 버전 영상까지 수십 번을 돌려보며 고든램지의 자그마한 혼잣말까지 외울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다. 쿠팡으로 난생처음 들어보는 향신료도 잔뜩 시키고, 1kg 통오겹살도 준비했다.



대망의 다음날, 12시 점심을 목표로 10시부터 일어나서 요리를 시작했다. 짝꿍이 고기에 칼집을 내기 시작했고 이때까지는 순조로웠다. 다음으로 트레이에 마늘과 향신료를 볶는데, 오븐용 트레이가 가스레인지를 견디기엔 너무 얇은 탓인지 트레이가 새까맣게 그을리며 타는 냄새가 온 집안을 풍겼다. 어느 때보다 심도 있는 불조절로 최대한 살린 후 와인을 붓는 단계가 왔다. 트레이가 너무 큰 건지, 고기가 너무 작은 건지 와인 한 병을 다 부어도 바닥만 찰랑찰랑하고 고기가 전혀 잠기지 않는 높이였다. 당황해하는 찰나에 짝꿍이 쏜살같이 편의점 가성비 와인 G7을 두 병 사 와서 콸콸 부었다.






씨름 끝에 와인 두 병과 함께 트레이에 빠진 고기를 반신반의하며 오븐에 넣었다. 팔각, 카다멈, 펜넬 씨앗 등 다양한 향신료도 넣었더니 온 집안에 향신료 냄새가 풍겼다. 너무 배가 고팠지만, 처음 해보는 요리니까 고든램지 매뉴얼에 최대한 따르기 위해 2시간을 꼬박 기다렸다. 기다리는 중간에는 약한 오븐 실내 조명등으로 살짝 보이는 통오겹의 비주얼에 감탄하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고 대망의 오븐을 열었다. 비주얼은 대성공이었다. 고든램지가 계속 중얼거리던 대로 Nice and Crispy 하게 오겹살의 껍질 부분이 제대로 튀겨진 모양새였다. 2시간 동안 오븐에서 고생한 오겹살을 꺼내준 다음 반으로 갈라보았다. 와아- 껍질이 Crispy 하다 못해 터프하게 딱딱해서 처음에 칼로 썰기 어려웠지만, 두툼한 오겹살이 완벽하게 푹 익었다.





오겹살 인생샷을 찍어주고 먹기 좋게 분해했다. 조각낸 오겹살에서도 향신료가 굉장한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입에 넣자 각종 향과 와인으로 숙성된 고기의 맛이 깊이 있게 올라왔다. 한 가지 미스는 껍질이 생각보다 너무 딱딱하게 쿠킹 되었다는 점이다. 씹을 때 뿌드득 대며 이빨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결국 나중에는 껍질은 떼어내고 부드러운 오겹살의 살코기와 지방만 먹었다.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만들어본 요리 중 가장 후각을 자극하는 요리였다. 짝꿍에게는 비밀이지만 뭔가 향신료에 담갔던 수육 같기도 했달까! 그렇지만 충분히 맛있었고 재도전할 가치가 있다. 다음번에는 더욱 Nice and Crispy 한 껍질을 위해 오븐에 굽는 시간을 조금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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