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주 한복 대여 퀘스트를 수행하자
그렇다. 이 날은 반쪽과 인생의 소중한 순간을 준비하는 여러 단계 중 하나로, 혼주 한복을 보는 날이었다. 양가 어머님께서 같이 만나는 일은 상견례 이후 처음이어서 걱정반 설렘반이었다. 하필 비도 추적추적 내려서 내가 날씨 요정이라는 믿음에 살짝 스크래치가 생긴 기분을 누르며 양가 어머니와 나와 내 반쪽, 이렇게 총 넷이 모였다. 내 반쪽인 예랑이와 열심히 서치 해서 알아낸 서울 종로의 어떤 한복집에서 이른 오전부터 우리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가게 입구에서부터 긴장감이 팽팽했다. 양가 어머님 사이가 아니라, 우리 넷과 험상궂은 한복집 사장님 사이에 말이다. 본인을 사장님이라고 소개하며 다짜고짜 대여 형식을 물어보시며 그걸 정하지 않으면 한복을 볼 수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예랑이는 참지 않고 그게 중요한 거냐며 따져 물었고, 사장님은 그건 뭘 몰라서 그렇다며 옷감마다 가능한 대여 형식이 다르다고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식들이 큰돈 쓸까 걱정하시는 어머님들은 무조건 저렴한 걸 하겠다고 하셨지만, 사장님은 또 가장 저렴한 원단은 사이즈 조절이 어렵다며 비싼 원단으로 우리를 몰아갔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든든한 예랑이가 저렴한 원단의 샘플부터 보여달라고 딱 잘라 방어했다.
이런 기싸움의 상황이 오면 나는 보통 긴장하는 편이라 오늘 여기서 결정을 못하게 되면 플랜 B가 없다는 사실에 혼자 살짝 걱정을 했다. 예랑이 어머니께서 스몰토크로 얼음장 같은 이 분위기를 애써 풀어주셨는데 이번에는 다른 직원 분이 나타나셨다. 말투는 친절하셨지만 이번에도 대치 상황이 펼쳐졌다. 우리는 매장에 전시된 샘플들을 보면서 고르는 줄 알았는데 사실상 원하는 디자인과 색상을 말해야 샘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예랑이 어머니께서 혹시 카탈로그라도 있으면 달라고 현명하게 대처하셔서, 결국 두 번의 대치 끝에 드디어 카탈로그를 보며 어머님 두 분이 각자 원하는 느낌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직원 분은 서너 개 샘플을 들고 나왔고, 그중에 누가 봐도 예랑이 어머님과 찰떡인 너무 예쁜 샘플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숨을 고르며 순조롭게 흘러가는듯 싶었지만 예신 어머니인 우리 엄마는 마음에 드는 게 없는 눈치였다. 본인의 추구미를 설명했지만 직원은 그런 느낌은 맞춤 제작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예랑이는 당연히 눈치 보지 말고 비싼 원단도 괜찮으니 맞추라고 얘기했지만 사실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엄마의 추구미가 나는 이해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그거 별로라고 복화술을 쓰고 싶었던 찰나, 손님 상대에 익숙한 그 직원 분께서 엄마에게 직접 원단을 보여주시며 어울릴만한 다른 색을 추천해 주셨다. 나도 옆에서 열심히 거들며 엄마의 추구미를 버리고 어서 빨리 무난한 결정을 하도록 손을 좀 썼다.
예랑이 어머님께서 고른 한복은 예상과 동일하게 너무 잘 어울리셨고 쿨하게 바로 마음에 든다고 컨펌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 엄마도 결국 나와 직원의 성화로 입어본 한복을 꽤나 만족스러워했고 치마 색 채도만 변경한 걸로 최종 컨펌을 해주셨다. 그리고 험상궂은 사장님이 맞춤으로 몰아가려고 맞는 사이즈가 없을 수도 있다며 지레 겁을 준 것과 달리 다행히 사이즈도 잘 맞았다. 한 시간 반을 머무르면서도 어머님들께서 한 벌밖에 못 입어봤지만 그래도 두 분 다 만족하시는 결정을 한 것으로 보였다. 최종 계약까지 마치니 효도한 느낌이 들어 뿌듯했고 한복 대여를 순조롭게 마무리해 주신 두 어머님께 감사함이 몰려왔다.
점심은 미리 예약해 둔 식당에서 낙지볶음과 수육을 먹었다. 어머님들께서 각자 예랑이와 예신이의 과거사(?)도 읊고 근황 토크도 하며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는 수다타임을 가졌다. 두 분은 두 번째 만남이라 어색하실 수도 있으실 텐데 이야기를 잘 이어가 주시고 우리 커플의 잡담도 많이 들어주셔서 마음이 충만해지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우리를 믿고 지지해 주시는 분들께 부끄럼 없는, 자랑스러운 예신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일어나자는 얘기에도 극 내향형인 우리 엄마와 예랑 어머님께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에 두 분도 오늘 틀림없이 즐거우셨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맘때쯤 비도 그쳤고 엄마랑 종로를 산책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내내 엄마가 스멀스멀 웃고 있었다. 집에서 엄마는 점심 대화 주제 중 본인만 아직 못 본 ‘폭삭 속았수다’ 드라마의 30분짜리 요약 유튜브를 시청하고 있었다. AI 목소리로 애순이와 관식이의 러브 스토리의 요약본을 듣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싶지만 말이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의 여운을 즐겼다. 멀리 다녀와서 힘든 하루였지만 고운 어머님들께서 한복을 차려입으실 날이 벌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