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이후로 처음 상을 당했다.
작년부터 경사보다 조사가 많았다. 결혼식이 가장 많을 나이지만, 이유를 알 수 없게도 슬픈 일의 연속이었다. 그 날은 출근길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당혹스러웠지만 당황스럽지 않았다.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많이 아프셨기 때문에 사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예상하던 일이 결국 일어난 것이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조모상 휴가를 내고 출근하신 분들께 말씀드린 후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부탁한 적은 없지만 고맙게도 내 반쪽은 나와 함께 동행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줬다. 그렇게 2시간을 달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이미 와있었던 상주인 아빠는 역시나 힘들어보였다.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는데 크게 실감이 나진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서운하시겠지만 그래도 올 초에 찾아 뵈었었기 때문에 죄책감은 덜했다. 그래도 그 날이 마지막이었을 줄이야.
할머니는 여느 시골 사람답게 힘든 생을 사셨다. 항상 허리는 굽어계셨고, 손은 거칠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 손주들이 찾아오면 항상 반갑게 맞아주시고 한가득 잔치상을 차려주셨다. 댁에 갈 때마다 사골국만 먹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그 뽀얀 곰국이 귀한 것인 줄도 몰랐었다. 나는 고등학생 이후로는 공부를 하며 바쁜 세월을 보냈고, 그 세월은 나보다 할머니에게 더 영향이 컸다. 한창 공부를 끝내고, 문득 찾아뵈었을 때 이미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실 정도로 몸이 안 좋으셨다.
입관식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만약 참여했다면 아직 법적 혼인 관계는 아닌, 그렇지만 같이 와준 반쪽에게 미안한 일이기도 했다. 대신 친동생, 내 반쪽과 함께 식사 겸 환기를 하러 나갔다. 가까운 곳에 살고 계시는 외할머니도 모시고 다녀왔다. 어쩌다보니 처음 반쪽을 소개시켜드리는 자리기도 했고, 손녀가 처음 사드리는 식사기도 했다. 할머니의 상에 집중해야 하는 타이밍일 수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지금까지 못했던 효도를 몰아서 외할머니와 좋은 시간을 보냈다.
발인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회사에서 감사 메일을 보낼 예정이었지만, 조의금을 보내주신 분들께 먼저 감사 인사를 한 번 더 드렸다. 기대수명이 훨씬 짧았던 윗 세대의 입장에서는 회사 후배의 조부모님 상까지 보태주실 이유가 없음에도 마음써주신 분들이 계셨다. 그렇게 머릿속에 생각했던 모든 일정을 끝내니 이제 진짜 조금 실감이 났다. 다시는 뵐 수 없겠구나.
모든 사람들이 언젠간 한 줌으로 돌아간다. 그런 명백한 사실을 알지만, 스스로는 꽤 오래 살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며, 미래를 위해 하루도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선택과 결정이 필요한 순간일 때 나의 기준은 항상 동일했다. 미래지향적이고 내일의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향. 그렇지만 상을 치른 시점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내일을 위해 오늘 아등바등 살 필요 없다는 생각에 갑자기 차분하고 힘빠지게 만들었다. 이런 기분이 오래 잠겨있고 싶지 않다. 이럴 때는 카페라도 가서 머리를 식혀야 한다. 먼 미래가 당도할거라는 확신으로 오늘을, 다음주를 살아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