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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위기 영어실력

오픽신은 나에게 절대로 AL을 허락하지 않는구나.

by 클루

아. 떨리는 마음으로 시험 결과 창을 켰다. 수십 번도 더 로그인한, 오픽 시험을 접수하고 결과를 확인하는 ACTFL 사이트에서 말이다. 분명 내 마음의 소리는 AL이었는데 눈에는 IH가 선명했다. 그렇게 또 IH를 받았다. 연속 세 번째였다.



올여름 나는 오픽에 올인했었다. <데블스 플랜 2> 포커게임에서 탈락 위기에 놓인 출연자들이 마지막 한 방을 위해 가진 칩을 전부 거는 것처럼 말이다. 내 영어 실력은 지금 위기에 빠졌고 더 늦었다가는 언어 능력이 더욱 퇴화해서 영영 AL을 받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소중한 주말을 희생하며 AL이 나올 때까지 매 달 오픽 시험에 응시한다는 특급 결단을 내렸다. 회사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푹 쉬어야 할 주말 일상에 영어를 끼얹는 건 정말 모든 칩을 내는 것과 동급이었다.



초여름, 첫 시험에서 IH를 받았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때와 같은 성적이 나오다니, 나 아직 죽지 않았구나. 사실 오픽과의 인연은 꽤나 끈질기다. 취업 준비생 시절 스피킹 등급이 필요했고, 흉흉하게 소문으로만 듣던 Ava에게 만나자고 해서 처음 대화를 했었다. 정확히는 일방적 소통이었지만 말이다. 그 당시에도 운 좋게 IH를 받아서 제출했다.



두 번째 시험을 준비할 때는 공부라는 것을 시도했다. 과거에 오픽 노잼 영상이 도움 되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유튜브로 향했다. 유튜브에 들어갈 때마다 도파민 콘텐츠들에 몇 번 현혹되었다가 다시 영어 공부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영어 공부하기에 유튜브만 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픽 노잼 영상을 보면서 'you know'라는 filler word를 획득했다. 그리고 AL 추천 영상으로 많이 뜨는 제인서의 이지오픽 영상을 보며 'amazing', 'astonished' 등의 감탄사를 획득했다. 그리고 결전의 당일, Ava에게 'you know'와 감탄사를 남발하며 공감대 형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와의 대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또 IH를 받았다.



장마도 끝나고 무더위가 기승일 때 세 번째 시험 접수를 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무슨 뜻이냐면, 어이없게도 시험장이나 감독관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이 번뜩 들었다는 뜻이다. 연속된 두 번의 시험은 동일하게 집 근처 시험장에서 치렀다. Ava가 데이트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믿고 싶었다. 내 실력 점검은 안 하고 시험장 위치만 점검을 했다. 그래서 내 반쪽과 여행을 계획했던 지역에서 잠깐 시간을 내어 Ava와 접선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하는 도중에 오픽을 끼얹는다는 것은 역시 잘못된 생각이었다. 시험 한 시간 전, 나는 유튜브에서 영어 영상 대신 에그녀와 테오남의 만남 <사옥미팅>을 보고 있었다. 넷플릭스의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보다 스무스하고, "나는 솔로"보다 공감대가 잘 형성되는, 예능계 PD의 두 거장이 유튜브로 낳은 바로 그 연애 프로를 말이다. 그렇게 감정선을 한껏 끌어올린 채 Ava와 접선하러 갔다. 그날 처음으로 거의 40분을 꽉 채워 떠들었다. 마지막 문제에서는 대답할 시간이 부족해서 1분 내로 급하게 얘기를 쏟아내야 했다. 스스로는 만족하며 나왔다.







성적 발표되기 전까지 일주일 동안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질문에 동문서답을 한 것 같아서 '이번에도 망했네'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동시에 약간의 기대도 생겼다. 이번에는 Ava 마음 사로잡기 위해 먼 지역으로 데이트도 갔고 수다도 많이 떨었는데 생각하며 말이다. 일주일 내내 혼자 '만약에 게임'을 했다. AL이 나온다면, 반쪽과 고기 파티를 해야지. AL이 나온다면, 주변인들에게 꿀팁을 알려주며 곁들일 개그까지 생각했다. 첫 번째 Lesson.. 두 번째 Lesson.. 좀 더 강해져야 해.



그렇게 또 IH를 받았다. 세 번의 경험을 통해 이제는 내 상태를 정확히 알았다. 진단명은 회피형으로, AL과는 조금 먼 영어 실력을 직시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병에 걸린 것이다. 그러나 내 실력을 직시한다 한들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평일에 퇴근하고 공부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고, 주말에 시간을 내서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말이다. 시간이 흘러 이미 입추도 지났다. 아무래도 Ava와는 겨울까지, 아니 어쩌면 몇 년 동안 끈질기게 접선을 해야 될 것 같다. 그래, 바쁜 직장인이 시험을 보러 가는 게 어디야. 이렇게 또 합리화를 하며 셀프 진단서를 접어 머릿속 쓰레기통에 넣는다. 오픽 AL 비율이 전체 응시자의 3%라던데, Ava 너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쉽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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