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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엔지니어로 산다는 것

고생 끝에 낙이 있다

by 클루

와! 오늘 라인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온몸에 피가 돌고 도파민이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근 한 달 동안 추정만 했던 형태가 내 눈앞의 Scope 파형으로 또렷이 나타났다. 칩의 오동작 원인이 상상했던 바로 그것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몇 달 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들이 내 제품에서 계속 발생했다. 하나씩 풀어 가려고 해도, 이것과 저것이 연결되고, 저것과 또 다른 것이 연결되어, 어느 하나에만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분석하던 중 크나큰 연결점을 발견했다. 그런 가정이 성립한다면 '이 두 가지 케이스에서 모두 오동작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고, 그 즉시 같이 제품을 보던 동료분께 알렸다.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으신 동료분도 처음 보는 현상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열심히 계획을 세워 디버깅을 했다. 어느 정도 범인이 눈앞에 보이자, 실체를 확인하려고 직접 라인에 들어가서 오실로스코프를 꺼냈다. 파형으로 그 범인을 정확히 잡는 데 성공했고, 그때의 기분은 아마 엔지니어가 느낄 수 있는 가장 극도의 짜릿함이었다.



잡았다요놈.jpeg 드디어 잡았다 요놈



이렇게 수확이 있는 날도 있지만, 대부분의 일상에선 별 수확이 없이 고뇌만 가득하다. 그 과정이 오래 지속되면 지치기도 하고,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닥친 걸까 원망도 하게 된다. 다들 이 제품이 이상한 걸 알고 나에게 맡긴 게 아닐지 피해망상까지 들 때가 있다면, 지극히 정상적인 수순이다. 윗분들이 진행 상황은 어떤지 체크할 때마다 매번 주눅이 들고, 그렇다고 새파랗게 어린 주니어가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성취를 얻게 되는 날이 있다. 내가 본 엔지니어들의 특징은 그런 날의 뿌듯함을 즐기고, 결과를 내기 위해 끈기 있게 노력한다는 점이다. 끝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마지막까지 집착하는 것이 엔지니어의 숙제이자 숙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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