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업무 관련 논문을 읽는 게 더 쉽겠어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사실 대학생 때부터 이 작가의 팬이었다. 한창 한국 소설에 빠져있을 때 주변에 소개하는 원픽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였다. 그런데 '왜 이 책이 원픽인데?'라고 물으면 대답하기에 정말 난감했다. 술술 읽히지만, 내용은 쉽지 않다. 스스로 많은 물음을 던져가며 정의해야 하는 책인 것 같다. 한강 작가님이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시점에, 이 책이 당시 나의 한국 소설 원픽이었던 이유도 정리할 겸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들을 적어봤다.
Layer 1: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두 폭력이다
소설책을 보며 반드시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굳이 찾아보자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폭력이다. 책 전반에서 물리적 또는 정신적 폭력이 묘사되어 있다. 1부에서는 채식을 거부하는 영혜에게 아버지가 뺨을 때린다. 그리고 주변 가족들은 영혜에게 끊임없이 먹을 것을 강요한다. 2부는 더욱 충격적으로, 형부는 영혜에게 강간 비슷한 물리적인 폭력을, 아내에겐 정신적 폭력을 행사한다. 3부는 영혜가 식음을 전폐하며 자신에게 폭력을 저지른다.
Layer 2: 3부작으로 세 가지 폭력을 대변하다
1부에서는 육식의 폭력성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육식은 살생을 거쳐야 한다. 영혜 주변 인물들은 모두 육식을 하고, 그들의 폭력성이 여러 가지로 발현된다. 때리고 강요하는 식, 합의를 이끌었지만 사실 강간으로 느껴지는 성폭력 등이다. 즉, 살생을 용인하는 육식하는 자들이 숨 쉬듯이 행사하는 또 다른 폭력성을 보여준다.
/* 육식을 반성하고 채식을 반드시 실천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채식으로 시작했고, 불과 도구의 발달로 사냥을 하여 육식이 시작되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육식을 위해 자본주의 아래에서 대량 생산한다. 채식과 다르게 동물들이 배출하는 가스로 인한 환경 파괴, 동물들이 좁은 공간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전염병 등의 문제가 수반된다. 육식이 자연과 동물에 끼치는 도 넘는 일방적인 폭력들을 용인한다는 점에서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있다. */
2부에서는 특정 신념 아래에서 정당화되는 폭력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는 2부에서 성관계는 형부의 개인적인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안다. 형부는 예술이라는 명목하에 마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처럼 영혜를 끌어들인다. 처음에 영혜가 거절했지만 꽃을 그리면 괜찮다고 한 대목도, 마찬가지로 판단력을 읽은 영혜도 그 행위가 예술로 승화된다는 점에서 합의한 것이다.
/* 책에서는 예술이라는 신념 하에 정당화된 폭력을 보여준다. 여기에 해당하는 수많은 예시는 과거에도 많았고 현재에도 빈번히 찾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사이비 종교에서 신도들을 성폭행하는 경우이다.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이미 판단력이 희미한 사람들을 본인의 잘못된 믿음으로 악용하는 일들은 이 사회에서 정말 많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과거의 학살도 가장 끔찍한 형태의 예시이다. */
3부에서는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책의 앞부분에서 폭력을 거부하고 있는 영혜라도 3부에서의 영혜는 이해할 수 없는 지나친 행동들을 한다. 이 부분은 다음 단락에서 적어보려고 한다.
Layer 3: 폭력을 거부하는 자도 완벽하진 않다
책을 읽다 보면 점점 영혜조차도 정확히 본인이 무엇을 거부하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형부에게 털어놓는, 본인이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 그저 꿈을 꿨고, 그 꿈에서 내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들이 보였다고 한다. 그게 어쩌면 폭력성이라는 게 본인에게도 있다는 것을 시사한 게 아닐까 싶다.
실타래처럼 연결되듯, 영혜는 형부와 작업하며 언니에게 큰 상처까지 준다. 3부에서 영혜가 식물이 되려는 이유는 2부에서 언니에게 준 상처와 관련된 것처럼 느껴졌다. 폭력을 거부하려는 영혜도 자신을 도와주려는 언니에게 정신적 폭력을 행사한 셈이고, 영혜가 이를 반성하며 차라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생물체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즉, 스스로 폭력을 행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자 한 것이다.
이 책을 통틀어 폭력을 거부하자는 게 꼭 주제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폭력이 어떻게 우리 삶에 숨 쉬듯이 존재하는지 먼저 보여준다. 그렇지만 폭력을 거부한다고 표명하는 사람도 의도하지 않게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모순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한계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결국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본인의 시선만이 아닌 여러 시선에서도 바라보며 현명한 결정을 하라는 의미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