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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파수꾼 13

by 추세경

<엄마와 아빠>


엄마에게 아빠 얘기를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죽은 엄마에게 사라진 아빠에 대해 듣는다는 건 다시 생각해도 기묘했다. 아빠는 사라진 사람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아빠라는 건 원래부터 없다고 말해 왔지만 사실 아빠는 사라진 것이었다. 아내와 아들을 두고 떠난 아빠를 엄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죄를 주장하는 강간범을 보는 듯한 분노가 엄마의 마음속에 있었다. 그를 이해하려 할수록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가끔씩 아빠에 대한 연민이 올라왔지만 엄마 자신에게 그에 대한 연민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들에게 아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엄마와 아빠는 보육 시설에서 만났다. 그때만 해도 고아원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엄마는 두 살 때 고아원에 맡겨졌고 열 여덟 살 때 그곳에서 아빠를 만났다. 둘의 나이는 여덟 살 차이었다. 아빠는 경기도 양주에 있는 원단 편직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기업의 사회적 참여를 독려하던 시기에 회사 사장은 경기 도청에서 주는 보조금을 받겠다고 휴일에 직원들을 강제로 봉사활동을 보냈다. 아빠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쉬는 날 왜 봉사활동을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아원에 세 번째로 갔을 때 엄마를 처음 만났고 그 이후로는 봉사활동 가는 날만 한 달 내내 기다렸다. 야간 교대조로 밤을 새운 다음날도 봉사에 빠지지 않았다. 아빠를 설레게 하는 건 엄마가 잘 웃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고 쌍꺼풀 진 눈은 작은 편이었지만 웃을 때면 눈꼬리가 밑으로 쳐져 사람 마음을 건드리는 게 있었다. 그 미소를 볼 때마다 아빠는 이 아이도 나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다며 설렜고 속에서는 당장이라도 포옹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엄마는 30명 남짓 되는 고아원 아이들 중 나이로는 다섯 번째였지만 리더 격인 '생활 반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고아원 교사가 없을 때는 봉사를 간 공장 사람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하루는 고아원 시설을 청소하는 봉사를 하는 날이었다. 푸근한 봄 공기가 마음을 들뜨게 하고 새벽에 내린 비에 맑게 갠 하늘이 청명한 날씨였다. 공장 사람들은 각자 청소 구역을 배정받았고 아빠는 교실 청소를 맡게 됐다. 화단 방향의 교실 유리창에 세정제를 뿌리고 걸레로 닦으려는 데 밖에서 화단을 정리하던 열여덟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반갑다는 듯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유리 세정제의 하얀 거품과 유리창에 떨어지는 햇빛 알갱이, 그 사이로 보이는 열여덟 소녀의 밝은 미소에 세상이 멈춘 것처럼 아빠는 느꼈고 저 소녀와 결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엄마는 봉사자들이 싫었다. 봉사하러 온 사람들 중에는 한 없이 친절하게 굴다가 어느 순간 말도 없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억지로 피아노 학원에 끌려온 남자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어렸을 때는 대학생들 중 잘생긴 오빠가 있으면 괜히 옆에 붙어 수학 문제도 물어보고 영어 단어도 물어봤지만 적극적으로 다가갈수록 오히려 귀찮아하고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엔 그게 슬펐고 어쩔 때는 그리운 마음을 주는 사람도 있지만 열세 살이 넘어서는 봉사 하러 오는 사람들이 그냥 귀찮았다. 대학생 봉사동아리, 회사 소속 봉사 단체, 교회 사람들, 사회 복지 재단, 어린이 재단, 마을 부녀회 등등 봉사를 오는 단체는 많았다. 봉사자들은 그들의 세계와 고아원의 세계가 이미 분리되어 있다는 전제로 친절이라는 이름의 동전을 던졌고 엄마는 그것이 본인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가끔씩 정말 선한 마음을 가지고 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속마음이 뭘까 여러 번 의심을 해도 선행 자체를 즐기고 우리를 돕는 걸 행복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필요한 건 모두에게 나눠지는 복지 기금 같은 사랑이 아니라 엄마만을 위한, 엄마만을 향한, 오직 엄마에게만 주어지는 사랑이었다. 봉사자들 중 그 누구도 자신에게 그런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걸 알았고 그 후로 모든 봉사자들은 엄마에게 귀찮은 손님에 불과했다.


엄마는 아빠를 처음 봤을 때 만화에서 본 피노키오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엉성하게 기른 구레나룻과 넓고 각진 턱이 남자다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촌스러웠다. 덤벙한 앞머리가 눈썹까지 이마를 덮었는데 크고 쌍꺼풀 진 눈이 저 혼자 반짝였다. 아빠는 처음 온 날부터 그 큰 눈으로 엄마를 흘끔거렸다. 엄마에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 남자들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아빠는 그중에서도 가장 순박해 보였고 나쁘게 말하면 가장 멍청해 보였다. 처음 아빠를 보았을 때 가끔 와서 추파를 던지는 다른 남자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봉사 중에 조용히 옆으로 와서 밖에서 밥을 한번 사준다고 하는 대머리 아저씨도 있었고, 월급을 많이 주는 일자리, 알고 보면 술집이나 사창가 창부 자리를 주선해 준다는 모 어린이 재단의 간부급 인사도 있었다. 엄마는 그들을 혐오했고 아빠의 맑은 눈 이면에도 음흉한 괴물이 있을 거라고 의심했다. 하지만 목적을 위해 호의로 위장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빠는 엄마에게 제안하는 것도 없었고 잠깐의 인사 말고는 이년이 넘게 말도 걸지 못했다. 같이 오는 봉사자들이 종종 바뀌는 중에도 아빠는 봉사에 빠지지 않았고 여전히 크고 맑은 눈으로 엄마를 힐끔거렸다. 성인이 되기 전 마지막 연말이었다. 크리스마스 행사로 봉사자들이 하나씩 포장해 온 선물을 학생들이 제비 뽑기로 하나씩 고르는 이벤트가 있었다. 엄마가 뽑은 건 하얀색 털장갑이었고 그걸 준비한 사람이 바로 아빠였다. 엄마는 내심 그게 아빠의 선물이길 바랐고 아빠는 엄마가 그걸 고르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엄마가 스물두 살 때 둘은 결혼했다. 혼자 사는 친할머니에게 아빠는 엄마를 인사시켰다. 나의 할머니라는 사람은 의정부에 있는 작은 주택에서 시장에 산나물 등을 가져다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분이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고아여서 탐탁지 않았지만 나이가 어리고 골반이 크고 쌍꺼풀이 없는 건 마음에 들었다. 결혼식 같은 건 없었다. 아빠는 자취방에서 엄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아빠는 포천에 있는 공장에서 작업자로 회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회사 사장에게 발탁 돼 서울 성수동에 있는 회사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회사에서 30분 거리 원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고 엄마는 고아원 원장이 연결해 준 회사에서 청소 일을 시작했다. 엄마는 고아원에서 공부를 배우긴 했지만 학교에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에게 필요한 건 가족이었고 직접 번돈으로 해 나가는 혼자만의 생활이었다. 둘은 행복했다. 이해할 수 없는 고집으로 화나게 할 때도 있었지만 아빠는 상냥한 편이었다. 남편이라는 처음 생긴 가족이 엄마는 더없이 소중했다. 엄마는 출근이 빠른 편이었고 아빠는 퇴근이 늦은 편이고 그때만 해도 주 6일을 출근했기 때문에 얼굴을 자주 볼 순 없었지만 집에 가면 가족이 있다는 게 때로는 가슴이 벅찰 정도로 좋았다. 같이 쉬는 날이면 어린이 대공원에 가서 코끼리를 보기도 했고 버스를 타고 뚝섬에 가서 가을 공기를 머금은 한강을 걷기도 했다. 높고 세련된 한강변 아파트를 보면 성수동 반 지하 원룸에 사는 처지가 슬프고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우리도 언젠가 새 아파트에 살자고 한강 위로 비치는 달빛에 희망을 다짐하기도 했다. 오 년 뒤 그간 악착 같이 모은 돈에 융자를 끼고 강북에 있는 신축 빌라를 매매했다. 돈을 안 쓰고 모으는 것 말고는 경제관념이 일절 없었지만 남편의 회사 사장이 외근을 나갈 때면 남편을 기사처럼 부렸고 같이 가는 차 안에서 일단 집은 한 채 있어야 한다고 남편에게 수차례 얘기해서 실행한 일이었다. 꿈꾸던 아파트까진 아니었지만 단칸방에서 거실에 방이 두 개 딸린 새집으로 간다는 사실에 엄마는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따로 피임은 안 했지만 오 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었는데 복은 겹쳐서 오는지 이사한 지 얼마 안돼 임신을 했다. 축복받은 계절인 5월 초, 어린이날 하루 전날에 내가 태어났다. 바쁘고 힘들었지만 행복했고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다.


내가 두 돌이 되고 얼마 안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공사 중이던 맨홀에 발이 빠진 실족사였다. 장마도 아닌데 폭우가 내린 날이었다. 맨홀 주변에 공사 중으로 설치해 둔 표식들이 빗물에 쓸려가 없었다. 빗물에 지반이 약해졌고 맨홀 뚜껑은 할머니의 무게도 지지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하수구가 깊지는 않았지만 떨어지며 머리를 부딪힌 게 문제였다. 사인은 뇌출혈이었다. 문제는 아빠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빠는 변하기 시작했다. 가끔 마시던 술을 매일 같이 마셨다. 한 번은 취해서 집에 온 뒤 화장실에서 소리를 지르고는 울기 시작했다. 놀란 엄마가 화장실에 들어가니 아빠는 본인 얼굴을 두 손으로 더듬으며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이 할머니를 너무 닮았다며 우는 눈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아빠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남편의 낯선 모습에 순간 마음 한편이 싸늘하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할머니를 빼면 아빠도 고아와 다를 게 없었고 유일한 핏줄을 잃은 슬픔이 어떤 건지 몰라도 힘들겠 거니 짐작했다. 그러면서도 서운함은 쌓였다. 아빠가 술주정을 할 때면 아이는 울었고 몸을 못 가누는 남편 때문에 혹시나 아이가 다칠까 조심하는 할 때는 화가 났다. 그렇게 슬퍼할 거면 살아 있을 때 더 잘했어야지,라는 마음도 있었다. 엄마가 보기에 아빠가 효자는 아니었다. 속을 썪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할머니에게 말 한마디 살갑게 하는 아들도 아니었다. 결혼 직후에는 그런 모습이 한편으로는 우리 가정을 더 위하는 것 같아 좋았지만 이제 와서 저렇게 슬퍼하는 걸 보니 엄마는 혼란스러웠다. 엄마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참는 게 가정을 지키는 일이었고 아이를 위하는 일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일 년이 지났을 때였다. 아빠는 회식을 마치고 그날도 술에 절어서 들어왔다. 엄마는 출근이 일러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아빠가 신경 쓰여 쉽게 잠들지는 못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고 그제야 잠에 좀 들려는 데 남편이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하면 자주 그랬기 때문에 그러 려니 했는데 그날따라 이상한 얘기를 했다. 자기 엄마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살아있으니 할머니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근데 나는 이 집도 지켜야 한다고,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하는 등의 얘기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매일 같이 할머니가 죽어서 슬프다고 하던 사람이 이제는 할머니가 살아 있다고 하니 그 뒤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다. 귀를 기울였지만 별다른 소리가 없었고 거실로 나가보니 구두도 벗지 못하고 현관 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기고 겨우 끌어서 거실에 눕힌 뒤 바지의 버클을 풀러 주고 목 뒤에 쿠션을 대주고 배위로 담요를 덮어주었다.


다음날 출근하고 점심시간이 되기 전이었다. 아이를 봐주는 이웃 아주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이 오늘은 아이를 맡기러 안 왔다고 무슨 일 있냐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남편에게도 전화를 해봤지만 연락이 안 돼서 전화하는 거라고 했다. 엄마는 그럴 리 없다고 했다. 술에 아무리 취해도 자기 출근 시간과 아이를 이웃집에 맡기는 일은 빼먹지 않던 남편이었다. 아침에 남편에게 연락이 없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거였다. 남편에게 전화를 다섯 번이나 했지만 받지 않았다. 반복되는 통화 연결음을 듣고 있으니 왜 인지는 몰라도 고아원에서 한밤 중에 잠이 깨 화장실에 가던 때가 생각났다. 잠시 하늘이 핑 도는 느낌이 들었고 일단 회사를 뛰쳐나왔다. 동료에게 무슨 일인지 설명도 못하고 일단 나왔다. 택시를 잡아 탔고 집에 가는 내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무의미한 신호만 반복됐다. 깊이도 모르고 방향도 알 수 없는 물속에 빠진 것 같았다. 택시는 자꾸 빨간 신호등에 걸렸고 남편은 전화를 안 받았고 아이의 소재는 알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라 차도 막혔다. 엄마를 괴롭히려고 시간이 걸음걸이를 늦춘 것 같았다. 아빠에게 부재중 통화를 30통을 걸었을 때 집 앞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거스름 돈도 받지 않고 빌라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현관 앞에 못 보던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지만 엄마가 현관 앞으로 가니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계단을 올라가 사라졌다. 엄마가 집에 들어가자 아이(나)는 기다렸다는 듯 울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이에게 달려가 안아줬고 미안하다며 같이 울었다. 엄마는 아이를 달래고 밥을 챙겨 주면서도 한 손으로는 계속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문자도 여러 통을 남겼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남편을 볼 수 없었다.


남편은 어디에도 없었다.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사라진 듯 어디에서도 남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며칠 뒤엔 경찰에 실종 신고도 했고 사건을 배정받은 경찰관이 남편의 동선을 CCTV로 추적도 했지만 결국 남편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남편을 집을 나와 택시를 탔고 양주 포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내렸으며 화장실로 향하는 시시티브이 영상까지도 확인을 했지만 화장실에서 나오는 영상은 찾을 수 없었다. 경찰은 택시 차량 번호를 확인해 택시 기사에게 까지 연락을 했지만 택시 기사는 본인도 택시비를 받지 못해 허탕 쳤다며 화가 나고 억울하다는 입장이었다. 택시 기사 말로 남편이 목적지로 얘기했던 곳은 양주에 있는 시어머니를 모신 납골당이었다. 경찰은 납골당을 찾아가 납골당 출입 기록을 확인했지만 남편이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시어머니를 모신 납골함도 원래 모셨던 그대로 잘 있었다. 남편이 왜 사라졌는지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결국 남편은 어떤 사고를 당하거나 불가피한 이유로 집을 나간 것이 아닌 자기 의지로 집을 떠난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남편이 사라진 이유에는 분명 시어머니의 죽음이 연관이 있었다. 남편은 사라지기 전날 혼잣말로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택시기사에게 납골당을 목적지로 말한 뒤 휴게소에서 사라졌다. 엄마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빠의 회사를 찾아갔다. 회사 사장에게 남편의 행방에 대해 물을 때는 다리가 많이 떨렸다. 괜찮다고 편하게 말하라는 사장의 배려에 엄마는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사장이 직접 남편의 동료들을 한 명 한 명 사장실로 불러 엄마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남편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평소에 남편이 왜 사라졌는지 짐작할 만한 대화를 한 적이 있냐는 물음이었다. 그들과의 면담에서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남편이 모친상을 당한 뒤 많이 슬퍼했다는 얘기가 다였다. 도움이 되는 얘기는 아니었다. 사장은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엄마를 달랜 뒤 돌려보냈다.


남편을 찾으려고 노력할수록 단서가 더 많아지는 게 아니라 그나마 있던 가능성들이 사라져 갔고 어느새 남은 건 남편이 스스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기대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엄마의 마음은 음식물 쓰레기처럼 변했다. 갖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쌓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남편이 밉고 원망스러웠지만 그를 사랑했던 만큼 그가 그리웠다. 살면서 처음으로 진실된 사랑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혹시나 무슨 사고를 당한 건 아닌지 그가 안쓰러웠다. 이제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무력감과 왜 다시 혼자가 됐을까 하는 세상에 대한 배신감도 있었다. 남편이 맨날 술만 마실 때 좀 더 대화를 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사전에 남편의 행동을 말릴 수는 없었는지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이제야 걷고 말을 시작한 아기가 세상에게 아빠 없는 자식이라고 불릴 생각을 하니 차라리 같이 죽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죽는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두려웠지만 그만큼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달빛을 잃은 밤바다처럼 깜깜했다. 하지만 혼자 죽을 수는 있어도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 아이를 살리려면 엄마 자신이 살아야 했다. 살자고 마음을 먹을수록 결국 이 지경을 만든 남편이 미웠다. 모든 걸 준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모든 걸 빼앗기 위해 나타난 사람 같았다. 절망의 끝에 엄마에게 남은 건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절박함과 사랑했던 남편에 대한 증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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