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상한 나라의 파수꾼 16

by 추세경

소설책이라는 걸 찾아다녔다. 그게 벌써 4개월이 지났다. 휠체어에 탄 노인은 '소설책'이라는 것이 '이상한 나라의 도서관'에 있다고 했다. 정신이 혼미한 노인의 허언일 수도 있었지만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어떻게 찾아야 할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아무 단서도 없었다. '이상한 나라의 도서관'이라는 키워드로 인터넷 검색을 해봤지만 그런 도서관은 없었다. 연관 검색어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어느 도서관이든 일단 찾아가 보는 것뿐이었다. 모든 도서관을 다녀 보기로 결심했다. 시립 도서관, 구립 도서관, 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등 가볼 수 있는 곳은 많았다. 어디부터 가는 게 효율적인지 생각해 봤지만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규모가 큰 곳부터 가야 하는지, 거리가 가까운 곳부터 가야 하는지, 머리를 굴려도 답이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상한 나라의 도서관'이라는 게 실제 도서관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한 은유나 암시일 수도 있었다. 돈가스와 제육볶음을 파는 분식집의 이름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움직여야 했고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겨울 추위에 떨면서도 매일 도서관을 찾아다녔다. 직장인이 매일 출근을 하고 식당 주인이 매일 가게를 열듯 나도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하루에 하나씩 도서관을 다녔고 4개월 동안 벌써 100여 곳이 넘는 도서관을 방문했다. 처음 한 달은 서울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다녔다. 각 지역구에 있는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오늘은 강북구, 내일은 도봉구, 그다음 날은 노원구, 2주 뒤에는 은평구, 와 같은 식으로 하루에 하나씩 구립 도서관을 다녔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 루틴이 생겼고 날씨가 따뜻하고 옷의 두께가 얇아지면서 도서관에 가는 일에도 탄력이 붙었다. 거리 상으로 먼 곳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갈 수 있었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진열된 책을 살펴보기도 하고 사서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도서관 층층이 뭐가 있는지 구경하기도 하고 도서관 주변을 한 바퀴 돌기도 한다. 단서를 가지고 뭔가를 낱낱이 찾아보는 게 아니라 일단 한번 돌아다녀 보는 것이다. 고양이 인간을 만나고, 신아영을 만났듯, 빨간 아이폰의 여자를 만나고, 휠체어의 노인을 만났듯, 길잡이나 이정표가 될 어떤 인연이나 사건을 찾아다니고 있다. 나에게 남은 건 핸드폰 하나와 지갑 하나가 전부였다. 다행인 건 내 계좌에는 엄마의 사망 보험금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당분간은 생활할 돈은 되었다. 그게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니 일단 돈을 아끼긴 해야 했다. 요새는 매일 찜질방에서 자고 있다. 샤워도 할 수 있고 잠도 잘 수 있으니 나 같은 사람에겐 최고다. 몸이 조금 피곤하지만 노숙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사람 구경도 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불안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고양이 인간은 나에게 곧 세상이 망할 것처럼 빠르게 뭔가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알던 세상과 다를 게 없었다. 자주 시끄럽고 가끔은 평화로운 곳. 원래도 세상엔 안 좋은 일이 가득하고 뉴스에는 사건 사고가 한가득인데 그는 곧 세상이 망할 것처럼 말했고 그게 왜 그런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일 수도 있었다. 내가 정신병에 걸려 혼자만의 상상 속을 살고 있다면? 그런 거라고는 믿고 싶지도 않았고 믿을 수도 없었다. 신아영과 만났던 시간은 생생한 감각으로 나에게 남아있고 잠시나마 엄마를 만났던 시간도 오감으로 기억하고 있다. 안 좋은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내가 해야 할 건 선택받은 자로서 엄마를 구하는 것, 지금으로서는 일단 그 ‘소설책’이라는 것을 찾는 일이었다.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 지루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선 움직여야 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문경으로, 문경에서 여수로, 여수에서 김제로, 그렇게 매일 가고 싶은 도서관을 정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경상북도 칠곡에 있는 도서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충북 충주에서 탔던 고속버스는 고속도로를 지나 국도를 지나고 있었다. 고속도로에서는 조금 잤는데 톨게이트를 지나 어느 순간 잠에서 깼다. 국도 길가에는 벚꽃이 끝을 모르고 피어 있었다. 창문에 관자놀이를 대고 멍하니 벚꽃을 바라봤다. 잠이 덜 때 몸에 힘에는 힘이 빠져 있었지만 그래도 벚꽃을 보니 좋았다. 신아영은 벚꽃이 만개했던 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물론 신아영도 선택받은 자였으니 그녀의 부모님도 아직 돌아가신 게 아닐 수도 있다. 우리 엄마처럼 어떤 균열 속에 갇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지금은 엄마가 살아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엄마는 사라졌고, 그게 정말 그쪽 세계에서도 사라진 건지 나는 몰랐다. 어쨌든 두 분은 함께 돌아가셨으니 함께 있는 게 아닐까, 그럼 우리 엄마보다 낫겠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즘의 생활이 외롭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봄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엄마를 어떻게 든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차기도 했다. 그렇게 희망과 불안은 역마다 오르내리는 지하철 승객들처럼 때때로 마음에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어느새 칠곡 터미널에 도착했다. 잠시 후 정차하니 빠진 짐이 없는지 살펴보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나에게는 용량이 큰 등산용 백 팩이 하나 있었다. 집 없는 생활이라 작은 소품들은 늘 필요했고 핸드폰 충전기와 칫솔 치약 같은 생필품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백팩은 가방이 커서 좌석 위 선반이 아닌 버스 바깥 짐칸에 실어 놓았다. 버스에서 챙길 건 핸드폰과 이어폰 밖에 없었다. 기지개를 켜며 버스 계단을 내려왔다. 두 시간을 넘게 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묵직했고 힘이 없었다.


버스 기사가 버스 하단의 짐칸 문을 열고 있었다. 문이 열려 가방을 찾으러 가는데 검정 캡에 검정 마스크를 쓴 남자가 내 가방을 들고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그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스크 위의 눈이 웃고 있었다. 나를 놀리는 듯했다. 남자는 역사 안으로 뛰었는데, 그렇다고 전력을 다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잡을 수 있으면 잡아보라는 듯 내 쪽을 자꾸 쳐다보며 뛰었다. 잠도 덜 깼고 잠시 당황했지만 정신이 들었다. 그를 잡아야 했다. 집도 없고 뭣도 없는 나에게 가방은 전재산과 다를 게 없었다. 지갑도 가방에 있었다. 카드도 돈도 신분증도 모두 지갑에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엄마랑 찍은 사진도 지갑에 있었다. 그를 쫓아야 했다. 뛰는 뒷모습과 골격을 보니 아직 성인이 아닌 것 같았다. 회색 후드에 검정 아디다스 운동복을 입었고 키는 180cm 정도로 커 보였지만 목과 손목의 골격이 얇았다. 성인이라고 하기엔 아직 변할 여지가 있는 체형이었다. 그는 나를 유인하듯 전력을 다하지 않는데도 나는 그를 잡기 힘들었다. 달리기가 느린 편이었고 체력도 별로였다. 그는 다리에 탄력이 있었고 다리도 길었다. 그가 마음먹고 뛴다면 이미 놓쳤을 상대였다. 그는 역사 실내를 가로질러 반대편 출구로 나갔다. 역 앞에는 4차선 도로가 있었고 횡단보도는 빨간 불이었다. 그는 달리면서 좌우를 살피더니 무단횡단으로 도로를 가로질렀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신호를 무시했는데 차에 치였던 생각이 나서 뛰면서도 오싹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역사 건너편으로 공원이 하나 있었고 그는 그쪽으로 달렸다. 그가 나보다 훨씬 빨랐지만 그는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힘들어도 계속 그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공원에 진입했다. 공원 입구 바로 오른쪽에서 생활체육기구로 운동을 하고 있던 아줌마가 소매치기를 쳐다보고는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발판에 허리를 좌우로 돌리는 운동 기구를 하고 있었다. 그 위에서 운동을 멈추고 우리를 쳐다봤다. 심상치 않은 상황인 걸 눈치챈 듯 보였다. 내 속도는 느려지고 있었다. 근데도 둘 사이의 간격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서 완전히 달아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공원을 잘 아는 것 같았다. 망설임이 없이 뛰었고 찾아갈 곳이 있는 듯 뛰었다. 공원 한쪽에는 축구장 크기만 한 인공 호수가 있었다. 그는 그 호수의 둘레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호수 둘레 길 옆으로는 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나무 옆으로는 공원과 바깥의 경계였다. 사람 허리 정도 높이의 합판으로 된 담장이 있었다. 그는 호수 둘레길 중간쯤에서 우측 샛길로 몸을 틀어 사라졌다. 샛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 이상 못 뛸 것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것마저 포기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그가 사라진 샛길 쪽으로 몸을 틀었는데 그곳에 그가 서 있었다. 호수 둘레 길 중간에 혹처럼 만들어 공간이었고 샛길 끝에는 벤치가 둘러진 작은 쉼터가 있었다. 그 뒤로는 나무가, 나무 뒤로는 공원 밖으로 나가는 담장이 있었다. 그는 내 가방을 벤치에 올려둔 채 보란 듯 서 있었다. 지친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역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유인하는 것이 맞았다. 더 이상 달아날 기미도 없었다. 나는 일단 심호흡을 했다. 숨이 차서 서있기도 힘들었다. 시선은 그에게 고정한 채 허리를 숙인 채 무릎에 손을 얹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이마와 볼과 턱에 땀이 흘렀다. 지고 있는 벚꽃 잎이 눈앞에 떨어졌다. 소매치기를 상대하기에 적당한 날씨라는 게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가 앞에 있는 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발 끝으로 툭툭 찼다. 뛰는 게 끝나 지루하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나는 이제 호흡이 돌아오는데 그는 더 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로(정확히는 가방을 가지러) 가려는 데 개가 두 마리 나타났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개 두 마리가 남자를 보호하 듯 남자 앞에 서서 나를 마주했다. 남자를 중심으로 좌 우에 한 마리 씩이었다. 둘은 같은 종을 넘어 쌍둥이나 되는 냥 똑같이 생겼는데 검은색 도사견이었다. 얼굴이 남자의 허벅지 정도에 위치할 만큼 덩치가 컸다. 털은 푸른빛이 돌 정도의 짙은 검정이었는데 두 눈의 사이가 멀었고 덩치에 비해 눈이 작았다.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커다란 송곳니가 치아 교정을 기다리 듯 뻗쳐 있었다. 개들은 두 마리 모두 한쪽 눈을 뜨지 못했는데 왼쪽에 선 개는 오른쪽 눈을 뜨지 못했고 오른쪽에 선 개는 왼쪽 눈을 뜨지 못했다. 개들은 귀를 앞쪽으로 기울이고 코에 주름을 모으면서 이를 드르렁거렸다. 금방이라도 나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뒤에선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까 도망갈 때는 눈웃음을 치며 놀리는 듯 달렸지만 이제는 모자를 눌러써 눈이 보이지 않았고 마스크도 껴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도망가거나 도움을 요청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차민규 씨” 하고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중저음이었지만 소리가 모두 갈라져 기괴했다. 담배를 30년은 핀 듯한 목소리였다. 외모만 봐서는 아직 고등학생 같은데, 그런 목소리를 가졌다는 게 이상했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표정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내 이름을 알아서 놀랐고, 이제 또 어떤 일들이 시작된다는 느낌이 들어 두렵기도, 흥분되기도 했다.


“당신, 나를 알아?”


“선택받은 자”


근데 조금 이상했다. 남자는 말을 할 때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스크를 꼈다고는 하지만 입이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차민규 씨. 지금 하는 걸 그만둬. 그게 당신을 위한 길이야” 그가 또 말했고, 순간, 그가 왜 이상한지 깨달았다. 지금 나에게 말을 거는 건 소매치기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왼쪽 다리 앞에 서 있는 개가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개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남자와 개 두 마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반년 전에는 고양이 인간이었는데, 이번에는 말하는 개였다.


“차민규 씨. 소설책을 찾고 있지? 그걸 하지 말라는 이야기야”


그렇게 말하고 개는 뒷다리를 모아 앉은 자세를 취했다. 앞 발로 자기 얼굴을 몇 번 긁었다. 개는 개였다.


“소설책이라는 게 뭔데?" 나는 정말 궁금했다.


"그건 알려줄 수 없어. 당신이 알 필요도 없고. 단지 하지 말라는 것뿐이야. 지금하고 있는 걸 그만둬. 그거면 돼. 간단한 일이지."


"네가 뭔데, 너는 누군데?"


"나는 현실의 파수꾼이야. 현실을 지키는 존재지. 당신처럼 세계를 혼란시키는 자들을 막고 있어. 참 성가신 존재야. 당신 같은 인간들"

"세계를 혼란시킨다고? 나는 엄마를 찾고 있을 뿐이야"


내가 말하자. 옆 쪽에 있던 개가 큰 소리로 짖기 시작했다. 짖는 소리 사이사이에 공백이 없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나에 대한 반감을 공격적으로 표현한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저렇게 덩치 큰 개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이 짖어대는 건 무서웠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나에게는 힌트가 필요했다. 소설책이 뭔지, 이상한 나라의 도서관이 뭔지, 다시 엄마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들을 통해 뭐든 알아내야 했다. 현실의 파수꾼이라고? 그건 또 무슨 말일까. 현실을 지킨다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은데 저들에게는 내가 악당인 걸까. 고양이 인간은 엄마가 소설의 세계에서 죽었다고 했다. 소설과 현실의 틈 사이에 빠져 버린 거라고, 그 틈에서 엄마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현실을 지킨다는 건 뭘까, 틈을 메운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틈을 메우는 걸 방해하는 사람인가? 혼란스러웠다.


"현실의 파수꾼이라고? 그게 뭔데? 왜 나를 방해하는 거야?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방해한다고? 그건 오해야. 나는 당신을 도와주려고 온 거야. 당신이 행복하도록, 더 편히 살 수 있게 조언해 주러 온 거라고."


"내가 소설책 찾는 걸 막으려고 하잖아"


"웃기는 군, 소설책이 뭔지도 모르잖아. 그건 당신에게 독이야"


"그래서 소설책이 뭔데? 그게 뭔데?"


내 목소리가 커지자, 옆에 있는 개가 다시 짖으려고 했다. 말하는 개가 짖는 개의 얼굴을 앞발로 치자 짖는 개가 입을 다물었다. 생긴 건 똑같이 생겼지만 대등한 관계는 아닌 듯 보였다.


"이봐 차민규 씨. 당신이 찾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당신은 정말 당신 엄마가 살아 있다고 믿어? 이미 장례도 치르지 않았나? 뭐를 믿고 엄마를 찾아다니는 거지? 소설의 세계라는 건 상상이고 허구일 뿐이야. 논리도 없고 개연성도 없지.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야. 삶의 진실은 상상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당신이 서있는 땅 위에 있어. 고양이 인간이 당신을 꼬드겼지? 그놈은 사기꾼이야. 입만 나불대는 존재라고. 내가 당신 앞에 나타난 걸 당신은 행운으로 여겨야 해."


"고양이 인간이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개가 웃긴다는 듯 짖어 댔다.


"그래. 순진하긴, 이래서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야. 고양이 인간은 완전히 사기꾼이야.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거짓 정보로 사람들이 희망을 품게 해. 실체 없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나락에 빠지게 만들어. 차민규 씨 당신도 지금 당하고 있는 중이라고."


개가 이야기하는 걸 듣고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할까. 개는 개 대로 짖어대고, 햇살 가득한 공원의 봄 풍경은 하나의 화면으로 내 눈앞에 떠다니는 것 같았다. 세상이 핑 도는 느낌이었다. 뛰면서 힘들었던 호흡은 돌아왔지만 상황 자체가 낯설었다. 정신을 붙잡아야 했다.


"내 눈에 사기꾼은 당신 같은데? 당신이 말하는 상상은 뭐고, 허구는 뭐지? 현실이 라건 뭔데? 나를 설득시키고 싶으면 제대로 설명을 해야 하지 않아?"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여유로워 보이던 개의 표정이 조금 더 뾰족해졌다. 혀를 좌우로 몇 번이나 날름 거렸다.


"상상이라는 건 일종의 에너지야. 존재하지 않는 걸 믿는 힘이고, 보이지 않는 걸 꿈꾸는 능력이지. 그에 반해 현실이라는 건 눈에 보이는 걸 믿는 거야. 힘을 믿고 물질을 이해하고 지위를 받아들이는 거지. 현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고 삶은 그 자체로 전쟁이야. 힘이 있어야 살아남고 지위를 가져야 안전하지. 현실을 직시하라는 건 그런 말이야.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을 쫓지 말고 당장에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하라는 거야. 잡아먹거나 잡아 먹히거나 결국엔 둘 중 하나야"


"나는 고양이 인간을 믿는 것도 아니고. 상상의 세계를 믿는 것도 아니야. 단지 엄마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쫓는 거야. 그것뿐이라고. 그리고 당신이 나를 가르치려 할수록, 오히려 당신을 못 믿겠는 건, 어떻게 개가 말을 하는 거지? 현실에선 개가 말을 하지 못해. 개는 개일뿐이야. 짖을 뿐이라고. 당신은 이미 상상 속의 존재 아니야? 그런 당신이 현실을 입에 담는 건 그 자체로 이해가 안 돼."


내가 말을 한 순간, 짖던 개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누렇고 뾰족한 이빨을 보이며 나의 삼 미터 앞에서 나에게 뛰어올랐다. 일순간이었고 나는 두 팔을 올려 얼굴 쪽을 보호하며 뒷걸음질 쳤지만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고 공포에 몸이 떨렸지만 실제적인 고통은 없었다. 내가 넘어지는 순간 말을 하던 개가 큰 소리로 짖어 댔고 그 순간 나에게 뛰어들던 개가 가루처럼 흩어져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걸 눈으로 봤으면서도 몸은 계속 떨렸다. 뛰어서 힘든 영향인지 하체에 힘이 빠져 경련이 일듯 다리가 떨렸다.


"차민규 씨. 두려워하지 마. 그 녀석은 내가 처리했으니. 충성심이 강한 건 좋지만 멍청한 건 용서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하며 그 개는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 개가 걷기 시작하자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정신을 잃은 듯 쓰러졌다. 원래도 영혼이 나간 듯 서 있기만 했지만 이제는 아예 쓰러졌다. 개가 걸어올 때 몸이 떨렸다. 그 개는 쓰러져 앉아 있는 내 앞에 섰다. 덩치가 커서 째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하지. 지금 하고 있는 걸 그만둔다면, 당신에게 선물을 주지. 평생을 써도 모자랄 만큼의 돈이야, 집을 원한다면 집을 줄 수도 있어, 차를 원한다면 차를 주지, 그래도 돈이 가장 깔끔하지 않겠어?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잖아. 방법은 간단해.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걸 그만두면 돼. 그 어떤 것보다 쉬운 일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당신은 평생 만져 보지 못한 큰돈을 가지게 될 거야. 약속하지”


“……”


아까 뛰느라 땀이 났었고, 이제는 땀이 식어 부는 바람에 목덜미가 시원했다. 얼마를 준다는 것일까, 어떻게 준다는 것일까, 궁금했지만 묻고 싶지는 않았다. 이 개는 착한 개일까, 나쁜 개일까, 아니 나는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나는 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할까. 합리적이고, 선한 판단을 하지 못할까. 나는 왜 어리석을까. 아니, 망설이는 게 죄인가. 머리가 아팠다.


"고민이 되나 보군. 아니면 내 말이 거짓말 같아? 이렇게 하지. 지금 당장 돈을 줄게.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면, 지금 주는 돈을 한번 더 주지. 계약금과 잔금처럼. 어때? 어렵지 않지?”


“돈을 어떻게 준다는 말이지?”


내가 말하자. 개는 기분이 좋다는 듯 혀를 날름 거렸다.


“당신 어머님 사망 보험금이 들어있는 계좌. 그 계좌를 한번 확인해 봐. 벌써 계약금은 입금했으니”


핸드폰을 열어, 인터넷 뱅킹을 켰다. 입출금 내역을 확인해 보니 돈이 입금되어 있었다. 금액은 ’ 25,000,000,000’이었고 입금자 이름은 ‘계약금’이었다. 250억이었다. 계약금만큼의 잔금을 한번 더 준다고 했으니 내가 받게 될 돈은 500억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500억이면 로또를 25번 당첨돼야 가질 수 있는 돈이었다. 머리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아갔다. 이런 셈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 자괴감이 들었다.


“놀랄 거 없어. 말했잖아, 간단한 일이라고. 당신한테도 간단한 일이야. 단지 하던 걸 멈추고 그냥 즐기면 돼. 그 돈으로 서울에 멋진 집을 사고, 최고급 인테리어도 해. 좋은 차도 사고, 맛있는 음식도 먹어. 그게 당신이 해야 할 전부야. 멋지지 않아? 은행에만 넣어 놔도 죽을 때까지 먹고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여행도 다니고, 여자도 만나고. 부족하면 더 줄 수 있어. 원 없이 줄 수 있다고. 어때? 그만둘 수 있겠어?”


“내가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데?”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야. 상상력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 강한 자만이 살아남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거지. 사람들은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그 힘으로 세상은 움직여. 나는 그걸 위해 노력하는 거야. 당신은 그런 나를 방해하는 거고. 세상은 복잡하지 않아, 단순하다고. 편하게 살아, 배부르고, 행복하게, 원하는 건 모두 가지면서, 그렇게 살아”


내가 말이 없자 개는 고개를 내리고 눈을 가늘 게 뜬 채 나를 쳐다봤다.


“바로 결정하기 곤란한가 보군. 고민할 시간을 주지. 1주일이야. 딱 1주일. 1주일 뒤에도 당신이 소설책을 찾고 다닌다면, 내 제안을 거절한 걸로 알지”


“일주일?"


“그래 일주일. 이건 경고이기도 해. 1주일 뒤에도 당신이 소설책을 찾는다면. 나는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 거야.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게,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게, 내 제안을 거절한 걸 평생에 후회하도록 만들 거야. 세상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천국에 갈 열쇠를 쥐어 준 거야. 천사처럼.”


“말이 좀 안 맞는데?”


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한쪽 눈을 찌푸렸다.


“나를 그렇게 만들 수 있으면,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면 되잖아. 왜 애써 돈을 주고 선택권을 주는 거지? 나를 그렇게 만들 능력이 없는 거 아니야?”


내 논리에 자신이 붙어 뒤로 갈수록 말소리가 커지고 빨라졌다. 개는 크게 한번 웃더니 이어 대답했다.


“생각보다 머리를 좀 쓰는 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야. 솔직히 나는 당신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어. 당신을 직접 죽이거나, 납치하거나 하는 등 물리적으로 당신을 헤칠 수는 없어. 그건 맞는 말이야. 세상의 규칙이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건 상상력을 파괴하는 일이지, 현실의 인간을 직접 괴롭힐 수는 없지. 하지만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나는 당신에게 먼저 선택권을 줄 거야, 지금처럼. 그게 더 재미있거든. 상상력을 쫓는 인간들이 재발로 현실에 순응하는 것. 그걸 보는 게 더 짜릿해. 그래서 그러는 거야. 당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은.”


“왜 사람을 당신 마음대로 조정하려는 거지? 그냥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조정하는 게 아니야. 도와주고 알려주는 거야. 당신은 운이 좋아. 돈까지 생기잖아, 안 그래?”


개는 자기 확신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의 말이 하나하나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1주일이야, 1주일. 그 안에 결론을 내자고”라고 말하며 개는 예의 그 송곳니 같은 어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더니 세상이 일순간 멈추었다. 동영상의 정지 화면처럼 찰나의 순간 세상에 잠시 멈춘 듯했다.


멈춘 화면이 시작되자 내 앞에 있던 개의 표정이 순하게 바뀌었다. 아까의 공격적인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강아지는 벤치 앞을 한 바퀴 빙 돌더니 공원 풀 숲으로 사라졌다. 소매치기를 했다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도 이내 정신을 차리더니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변을 양옆으로, 앞뒤로 둘러보니 벤치에 있는 가방에는 관심도 없다는 양 일어나 사라져 버렸다.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나를 처음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일절 신경 쓰지 않는 듯 내 옆을 지나쳐 호수 둘레길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머리가 복잡했다. 긴 한숨이 나왔다.

keyword
이전 15화이상한 나라의 파수꾼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