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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망 Sep 24. 2024

트라팔가의 수련

대체로 우중충하다가 잠깐 갠다면


런던에서 가장 영국 느낌이 나던 곳은 트라팔가 광장이었다. 19세기 영국의 위상이 높을 때(‘대영제국’이라고 불렸던), 트라팔가 해전의 승전을 기념하며 세워진 광장이라고 책에서 봤다. 거대하고 탁 트인 유럽식 광장에 서니 세계가 넓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양으로 항해를 나가고자 했던, 산업 혁명이 일어났던 활기가 공기 중에 느껴졌다. 지금은 소풍 온 아이들, 파이프를 부는 아저씨,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보인다. 비둘기가 광장을 걸어 다니다가 날아오른다. 저 새는 지금 멀리 공중에서 세계를 조망할 것이다. 



영국이 세계사에 미친 안 좋은 영향들을 지금의 아름다운 풍경과 떼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넬슨 제독과 주위 흑사자 동상을 보니 제국주의 생각에 씁쓸해진다. 영국은 한때 세계 1/5를 식민 지배했고 2차 세계 대전, 팔레스타인 문제 등 현재 진행형인 국제 관계에 악영향을 많이 끼친 나라다. 어느 나라나 이면을 갖고 있지만.


 나는 여행을 즐기면서도, 역사를 완전히 빼고 보진 못한다. 과거와 현재를 같이 보려 하는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일본 여행도 안 간다.) 여행 코스에서 대영박물관을 뺀 것도, 각국에서 약탈당한 물건들이 남의 나라 박물관에 있는 걸 보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았다. The British museum을 ‘대영’이라고 부르는 한국식 호칭도 사대주의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내셔널갤러리는 13~20세기 유럽 회화 위주로 전시해놔서 그런 불편함은 덜하겠지 싶었다. 트라팔가 광장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고, 적당한 규모에 관람하기 좋은 동선을 가진 박물관이었다. 가이드가 나오는 헤드폰을 끼고 그림과의 시간을 즐겼다. 견학 온 초등학생 아이들이 바닥에 퍼질러 앉아 낄낄거리고 장난쳤다. ‘파리스와 세 여신’ 그림을 설명해 주는 선생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했다. 그 아이들은 예쁜 금발 머리를 찰랑거리고 있어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그림 속 큐피드들 같았다. 



옆 방에선 화가 지망생으로 보이는 남자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림을 올려다보며 스케치북에 모사하고 있었다. 그의 헤어스타일도 약간 예수님 같았다. 입 벌리고 집중하는 모습이 멋져서 나도 모르게 예술혼에 감화돼 버렸다. 옆에서 주섬주섬 종이 쪼가리와 연필을 가져와 예수 그림을 따라 그려봤다. 하지만 얼굴 그리는 단계에서 이미 생각하던 것과는 한참 달라지고 있었다. 10분 뒤, 예수님께 죄송해지는 그림이 탄생했다. 바닥엔 다른 사람들이 그린 것도 여러 장 놓여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데생 연습실 같았다. 미술 학원 말고 박물관에서 회화 수련을 한다니. 다른 방에 가도 지망생들과 수다스러운 가이드들이 있었다. 영국이라면 예술에 대해 격식을 차리고 근엄할 것 같았는데 자유분방한 분위기라 좋았다. 





하이라이트는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작품 ‘수련’이었다. 그 유명한 수련 연작이 내 키보다 길게 걸려있는 것이다. 그림을 이렇게 크게 그린 것에, 또 벽을 통째로 할애해 걸어둔 시도에 감탄했다. 20분 넘게 하염없이 보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그림 속 희뿌연 색감은 새벽안개가 낀 것 같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유화 자국은 조화롭게 보이다가도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왔다. 레이어와 색채감이 다채로우니 어느 구석에 시선을 두어도 질리지가 않았다. 



내셔널 갤러리와 트라팔가 광장을 나오면서, 친절하고 매너좋게 대해준 영국 숙녀 신사들을 떠올렸다. 또, 이 광장은 1900년대 초반 서프러제트 여성 인권 운동이 벌어졌던 정치와 집회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국제 사회와 연대하는 시위들도 열린다. 2024년 9월엔 한국의 딥페이크 범죄를 규탄하며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행진 시위가 중국 여성에 의해 열렸다. 광장이 모두에게 열려있음을 보여준 고마운 일이었다. 



인간 사회는 정말 다면적이다. 수련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속을 알 수 없이 여러 겹으로 모호하기도 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여러 색채가 뒤섞여 아름답게만 보인다. 갈색과 초록색 구름에 가린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가까이서 뜯어보면 지난날의 과오들이 점점이, 명확히 박혀있다. 그제야 무슨 색을 쓴건지 알게 된다. 그걸 또 덧칠하는 과정에서 점들은 흐려지고 색이 섞인다. 나는 영국을 비롯한 서양 강대국들을 멀리서도 바라보고 가까이서도 바라보고 싶다. 그런 시각은 수련을 통해서 가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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