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과 경험 속에서 사진은 진짜 예술로 전이된다.
“사진의 가치는 개념에 있지 않고, 개념을 넘어서는 체험에 있다. 의도는 약할 수 있지만, 해석과 경험 속에서 사진은 진짜 예술로 전이된다.”
촬영의도, 의미, 전달 목적 등 개념적, 이성적인 생각은 잠시 미루어 두자. 의미를 생각하기에 앞서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고 있는지부터 살피고, 그냥 찍어보자. 찍고 나서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내가 바라본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의심하지 말고 그냥 찍어보자. 세월이 쌓이면 달리 보일 것이다.
What the human eyes casually and incuriously,
the eye of the camera notes relentless fidelity
- Berenice Abbott-
일명 개념사진이라고 하는 conceptual photography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회색 지대는 분명 존재합니다. 사진의 형식과 틀에 제한을 두지 않는 '창의성'과 '아름다움'의 경계를 무효화하는 작품 구성 방식은 간혹 체험적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다만, 추상적 개념, 작가의 철학과 메시지를 시각화하는 데에만 몰두한 작품엔 곧 흥미를 잃게 됩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비트겐 슈타인의 말과는 달리 말로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사진으로 시각화하려는 시도는 안쓰럽고 조악합니다. 개념의 시각화만을 담고 있는 사진보다는 개념의 시각화 이면에 체험적 여백이 존재하는 개념 사진이라면 끌릴 것 같습니다. 물론 개념을 억지로 시각화한 사진이라도 작가의 의도와 달리 메시지 전달에 실패했을 경우라면, 되려 작품으로써의 가치가 살아날 수는 있습니다. 어떤 작품이라도 긍정적인 면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의 구성 장치를 통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거나, 혹은 작가 노트의 작품 설명을 읽고 작품을 이해가게 된다면, 전시된 사진은 작가가 출제한 시험 문제고, 옆에 붙어있는 작가 노트는 모범답안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개념을 시각화한 사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작품 설명을 읽고 난 후 작가의 메시지를 알게 되고, 작품 구성의 이유와 근거를 찾아내는 만족감과 성취감이 작품 감상의 하나의 방법일 수 있고, 그렇게 즐길 수도 있지만,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다가간 작품 이해는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논리적인 감상에 매몰될 수 있어, 지적 허영을 충족하기엔 좋지만, 마크 로스크가 말한 '영적체험'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작곡가와 음악장르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반드시 개인적인 음악감상의 깊이와 통한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과 비슷합니다. 역시 회색지대는 존재합니다.
무심코 찍어둔 사진, 의무감에 찍어둔 가족사진과 아이들 사진, 세월은 사진을 숙성시키고, 무게를 실어주어 가치가 생겨납니다.
롤랑바르트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사진을 좋은 사진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진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정의해 놓은 개념들 투성이 세상을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개념들은 작가의 창작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개념과 개념의 관계에서 작가는 새로운 작가만의 장치를 통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때 발휘한 창의성은 작가를 흥분시킬 수도 있고, 작품으로 탄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체험의 부재는 또 다른 개념의 굴레를 확인하는 장치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발견한 새로운 언어장치로 개념사진을 만들어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개념이 이성적으로 명확할수록 관객은 체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고, 머리로 '아~~ 그렇구나' 하고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창의성에 감탄할 뿐입니다.
사진의 가치는 개념에 있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음에 있고,
나의 세월과 경험이 사진 작품을 만나 체험할 때 가치는 발생합니다.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체험을 카메라를 통해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 기록은 나에게 혹은 타인에게 예술적 체험으로 전이될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