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각의 오류에서 태어난 창조
AI시대에 인간 사진가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AI가 인간을 대체하면 어떻게 하지? 우리의 직업은 안전한가? 5년 안에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오픈 AI]의 샘 알트만 (Sam Altman)은 말했습니다. '그렇게 빨리는 불가능해'.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야'.라고 묻어둘 자신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두 배의 시간으로 늘려도 10년 안에는 닥칠지도 모를 일입니다. AGI가 고도화되면 ASI가 된다던데, 우리는 희망을 읽어내야 할 텐데, 전문가들조차도 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Agentic Ai 단계라고 합니다. 단순히 검색을 대신해 주거나, 대화를 하는 챗지피티 경험 수준을 넘어, 직접 다른 소프트웨어를 구동시켜 문서를 작성해 주거나, 항공편과 숙박등을 대신예약해 주는 에이젼트 개념의 AI가 지금 작동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또한 Robotic Ai는 하루가 다르게 인간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도 이미 2025년 말에 자체 개발한 AI 로봇을 현대자동차 공장에 투입해서 5년 안에 완전 대체 및 양산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젠 AI 도움 없이 사진촬영과 보정일은 상상하기 힘든 상태가 이미 되었습니다. 촬영의 정확도, 보정속도와 퀄리티는 기존 방식으론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이 중독성 강한 AI툴은 사진가의 일자리를 뺐어간다고 해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 사진가는 AI사진가와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요?
롤랑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를 다시 펼쳐보았습니다. 단서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선, 이번 글의 핵심 키워드는 표상 representation과 퀄리어 qualia입니다. 이 두 개념을 합치면 롤랑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되는데, Ai가 하지 못하는 영역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한시적이긴 합니다. 당장은 하지 못할 겁니다. 초지능 AI가 출현하면, 비슷한 경험을 AI도 해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인간의 유기체적 체험과는 분명 다를 것이기 때문에, 인간만의 푼크툼은 그 생명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푼크툼은 나를 찌르는 감정이지만, 동시에 어딘가로 나를 데려간다"
-롤랑바르트-
찌르면서 어디로 나를 데려가는 걸까요?
롤랑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 Camera Lucida]에서 '푼크툼'이란 개념을 소개합니다. 한 문장으로 말해보면 '사진이라는 시각적 표상을 통해 발생하는 퀄리어(qualia)적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는 것 같지만, 우리는 각자의 주관적인 표상(representation)을 보고 촬영합니다. 다시 말해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외부세계(사물, 사건 등)는 나의 인식 구조 속에서 재구성된 정보를 표상하고, 우린 그걸 촬영합니다. 결국, 같은 풍경을 똑같은 구도로 촬영하더라도, 우리는 모두 다른 풍경을 보고 찍게 됩니다. 그래서 칸트는 인간의 인식 이전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 즉 물자체(Ding an sich/Thing-in-itself)를 볼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각자의 감각과 이성을 통해 지각하고 구성한 나만의 세계만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재현한 표상에 덧붙여진 주관적 느낌이 퀄리어(qualia)입니다. 표상엔 퀄리어가 따라붙게 됩니다. 빨간 사과를 보더라도 '빨간 느낌'은 각자 다릅니다. 커피가 쓰다고 했을 때, 각자 느끼는 쓴맛의 감각은 같지 않습니다. 푼크툼은 사진이라는 시각적 표상을 통해 발생하는 퀄리어적 경험입니다. 표상에 의해 불러일으켜진 퀄리어, 즉 나에게만 작동하는 감각적 울림이 푼크툼입니다. 나의 의식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현상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데이터화가 힘들고, 로보틱 AI가 인간처럼 체험을 데이터화하고 패턴을 학습해서 퀄리어적 경험을 축적한다고 해도, 인간의 유기체적 체험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AI가 모든 면에서 인간을 압도한다고 해도, 체험과 느낌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영역이란 생각이 듭니다. AI시대에 인간 사진가로서 살아낼 수 있는 '틈'이 있다면, 퀄리어(qualia)적 경험이 인간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각적 오류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인간과 AI의 퀄리어적 경험은 차이가 날 것 같습니다. 인간은 그 오류에서 창조적 무언가를 찾지만, 아마도 AI는 그 오류를 용납하지 않을 듯합니다.
사진 한 장이 우리를 찌르는 그 ‘느낌’(푼크툼)은 무엇인가?
사진을 보다 보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불쑥 다가올 때가 있다. 그건 단순히 아름답거나 기술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다. 사진 속 사소한 요소 하나가 나를 찌른다. 익숙한 향기처럼, 잊고 있던 기억이 불현듯 스쳐간다. 롤랑 바르트는 이 감각의 찔림을 ‘푼크툼(punctum)’이라 불렀다. 사진의 사회적 맥락이나 미학적 분석이 아닌, 감각의 돌발, 주관적 상처. 그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되는 것이다. 그 순간 사진은 더 이상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과 감정의 통로가 된다.
그것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기억과 감정이 부딪히는 감각의 사건
푼크툼은 ‘보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틈에서 태어난다. 우리가 대상을 바라볼 때, 눈은 표상을 받아들이지만 마음은 그 표상에 자신만의 기억과 감정을 덧입힌다. 그래서 같은 사진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슬픔을, 또 다른 이는 따뜻함을 느낀다. 그건 사진이 전달한 정보가 아니라, 나의 내면이 되돌려준 반응이다. 푼크툼은 시각의 사건이 아니라, 의식의 마찰이다. 이미지와 감정이 부딪히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현실의 표면을 넘어, 자신을 마주한다.
AI가 이미지를 ‘분석’은 할 수 있지만, 그 ‘찔림’을 경험할 수 있을까?
AI는 사진을 픽셀 단위로 해석하고, 형태와 색, 구도를 계산적으로 분류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 감정의 흔들림은 없다. AI는 ‘아름답다’는 개념을 이해하지만, 아름다움에 상처받지는 않는다. AI가 세상을 본다. 하지만 세상에 찔리지는 않는다. 푼크툼은 논리적 일관성의 바깥에서 일어난다. 의미가 무너지고, 감정이 치밀며, 이성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이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인식 구조를 가질지라도, 그 틈 — 감각의 균열 — 은 아직 인간의 몫이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조차 신경의 전기적 패턴이라면, AI도 언젠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감각은 신경세포의 전기적 신호로 이루어진다. 감정의 떨림조차 패턴의 연쇄라면, AI도 언젠가 그 진동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감각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감각이 불러오는 해석의 틈이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세상을 정확히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틀리게, 왜곡되게, 주관적으로 본다. 그 틀림이 바로 예술의 출발점이다. 감각의 오류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피어난다.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은, 그 틀림의 순간이 만들어낸 창조의 스파크다.
푼크툼은 결국 감각의 오류, 해석의 틈에서 탄생하는 창조의 순간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의 틈을 찾아 비닐 위에 밀착합니다.” 그 말은 사진가로서, 그리고 감각하는 인간으로서의 나의 존재 이유다. 우리는 세상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언어와 논리의 구조 속에서 늘 어딘가 어긋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어긋남, 그 균열 속에서 예술은 피어난다. 푼크툼은 세상의 논리적 구조에 생긴 아주 작은 균열이다. 그곳에서 감각은 이성을 넘어, 존재를 찌른다. AI가 언젠가 그 틈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건 오류의 복구가 아니라, 오류 속에서 태어난 창조의 자각일 것이다.
AI가 오류를 받아들이는 그 특이점이 올 때, 인간 사진사는 끝이 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