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으로 초록은 동색
아내와 함께 하는 교회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다. 교인을 위한 도서관 겸 지역민을 위한 쉼터의 기능을 함께 하고 있어서 주일에는 늘 뵙고 싶은 님도 보고 뽕도 따는 격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예배를 마치고 도서관에서 한주 동안 읽고 싶은 책을 눈여겨 목록에 담아 놓는다. 그날도 교회 도서관의 서고에 있던 시집을 꺼내 읽던 나는 누군가 분홍색의 포스트잇을 거두지 않은 페이지와 마주했다.
감동적인 글을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도서관에서 대여한 시집에 형광펜을 집어 들지 못하고 분홍색의 포스트잇을 가지런하게 마킹해 애정을 주고 그 마음을 떼어 낼 수 없어 그대로 올려놓았을 것이다.
아마도 여러 문장과 단어 위에 마음이 머물고 시선이 함께 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시선과 눈을 마주했다.
잠시 시집의 주인이었던 독자를 상상해 본다. 그는 아마도 전공서적을 대하듯 포스트잇을 사용한 것으로 젊은 독자는 아닐까? 그리고 시인의 마음을 전공서적 대하듯 오래 기억에 두고 싶어 했을 것 같았다.
보람하다 : 다른 물건과 구별하거나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표를 해두는 것처럼 나는 그의 손에서 작은 분홍색의 포스트잇을 떼어내는 순간부터 정성을 다해 마킹할 때까지 모든 것을 깨끔하게 상상하고 싶어졌다.
포스트잇으로 점토를 붙여 조소작품을 만들거나 분홍색의 형광펜으로 수채화를 그리는 재주 같지 않은 재주를 부리는 사람의 맑은 기대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낯설지 않은 동질감을 느낀다.
나의 상상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책의 낱장을 주황색으로 마킹하면 어느새 주황색의 페이지가 되고, 초록의 형광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착각에 빠져 들기도 한다. 어느새 책은 주황색과 초록색으로 페이지를 불려 불룩해진다.
주황색의 형광펜은 그만큼 나를 도드라지게 했고 작은 포스트잇은 작가의 마음과 같은 색으로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책의 저자가 된다. 작가의 글에 공동저자가 된 것 같은 충만함을 느끼게 된다.
포스트잇의 나비효과는 여러 곳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아름다운 흔적과 깊은 상처를 공감하는 동지가 된다.
위안을 주는 동무가 된다. 고통을 눈감아 주는 연인이 되기에 충분하다.
작가의 고뇌는 나의 일상적인 말투로 치환되어 생각의 틈을 넓게 한다. 이제는 작은 흠결을 공유했다는 동질감으로 곧은 책의 날 선 페이지에서 벗어나고, 구김 없는 긴장감에서 벗어나고, 애지중지하는 품목에서도 함께 벗어난다. 그래서 더욱 소중해진다.
깊은 밑줄을 남기고 색을 덧입혀 97페이지와 98페이지를 앞뒤 구분 없이 하나로 만들어 버린다. 깊은 상처처럼 같은 색으로 물들인다. 그래서 더욱 애정이 깊어진다. 시험범위까지 충분한 흔적을 남겼으니 흐뭇하다.
결코 암기되지 않지만 기억에서 버려지지 않는 존재로 남는다. 흔들리지 않지만 페이지 사이가 어지럽다.
남이 아니라는 개인적인 편파적 치우침에 마음이 기운다.
형광색 펜과 포스트잇의 두께만큼 마음은 볼록렌즈처럼 부풀어 올라간다. 형광펜을 사용하거나 포스트잇으로 포만감을 표현하는 독자는 손 발짓이 비슷해서 I가 되고 E가 된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 수 있다.
시각적인 것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더 오래 남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를 위로할 뿐 원하는 결과로 함께 선명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이미 초록은 동색이다.
나의 상상이 행복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우리는 주황색의 형광펜과 포스트잇을 함께 가지고 즐거워한다.
그리고 우리는 동색으로 사랑스럽게 물들어 간다. 더욱 친근하게 읽고, 다정하게 느끼고, 부비 부비 하고
아름답게 97페이지와 98페이지를 공유하며 행복해한다.
우리의 동질감이 알록달록하게 물들어 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