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빛나는 청춘
그네들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그네들이 진학할 때는 하이틴 영화가 유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하이틴 영화가 미래에 그들이 공부할 곳에서 만들어지면서 영화의 주인공이 착용했던 교복을 입고 공부하는 꿈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네들은 교복세대입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처럼 개성 있는 교복세대는 아닙니다.
오래도록 검정교복을 입고 짧은 머리를 하고 공부를 했던 세대입니다. 검정교복에 검정모자는 같은 세대를 지나온 분들은 오호라~~ 하실 것입니다.
특이한 모양의 여름 하복을 입은 모습은 그네들을 하이틴 영화의 주인공처럼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자랑하고 싶은 반듯한 교복뒤에는 치열한 고등학교 입시를 마치고 숨 고르기 하던 시절이라 더 행복했고 돌덩이처럼 단단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격한 시대의 변화에 의무를 짊어진 세대는 아닙니다. 전쟁 후 국가를 재건했던 세대도 물론 아닙니다.
시절은 그들을 낀세대 혹은 찡긴 세대라 했습니다.
유교적인 세대인 삼십 년대의 부모세대를 모셔야 했고, 발전의 모태가 되는 개성 강한 젊은 세대의 중간에 끼어 있는 세대라 하더군요. 모든 세대가 그렇지만 동시대를 살아온 그네들에게 시대를 짊어질 고된 의무가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젊음은 스스로 빛나는 별처럼 반짝이는 보석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그 반딧불이 맞습니다. 젊음은 스스로 빛나지 않던가요?
그렇게 마음은 빛나는 지나온 청춘들이 함께 계곡에 모여 앉았으니, 시대를 돌려 그들만의 시간을 마주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결코 반짝이지 않지만 빛나던 그들만의 시간은 언제든지 하나가 되기에 고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늙은 청춘들은 서로에게 배려했고 마닐마닐한 마음은 농익은 과일처럼 그들만의 시간 속에 가득했습니다.
여행은 그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던 오래 전의 젊음과, 뒤따라오던 더 어린 젊음도 아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보다 오래된 젊음은 오갈 수 없었을 것이고 어린 젊음은 시간을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네들에게는 모든 것이 버무려져 만들어준 시대의 줄 바꿈 바로 전이라 가능한 시간이었습니다.
생각은 조금 더 유연해졌고 그네들에 대한 배려는 첫 경험처럼 말랑말랑해서 아름다웠습니다. 사륵사륵한
소리가 이렇게 큰소리로 마음을 채우는지 많이 놀라웠습니다.
그네들은 품을 앞세우면 시간이 부족했고 시간을 던져놓으면 다른 것이 지나치게 부족했습니다.
모든 것이 줄대로 서서 이제는 이루어져라 이루어져라 오래된 청춘에게 주문을 걸어 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젊은 청춘 하나는 궁색함이 없는 숙소를 예약했고.
또 다른 청춘이 정성을 다해 끓여준 라면은 우리의 마음처럼 꼬들꼬들 싱싱했습니다.
운전하던 또 다른 청춘은 무알콜의 음료를 세상없는 맛으로 즐기며 고마운 티를 더했습니다.
그들의 배우자도 마음만 젊은 청춘의 걱정스러운 외출에 너그러움을 더해주는 배려를 잊지 않아 고마웠지요. 그래서 우리를 이가 빠진 모습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십 년의 약속을 잊지 않고 기다려준 학교 운동장에 묻어둔 타임캡슐과 같았습니다.
그 세월을 기다려준 타임캡슐과 젊은 청춘들의 기대가 함께 열리는 흥분된 시간은 모든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함께 오가는 여행이 이들만 있는 것처럼 유난스럽지만 흉이라 해도 이처럼 모지라지고 싶었습니다.
개성 강한 돌멩이로 만들어진 그네들이 처음부터 뽀작뽀작 하지 않았습니다. 보편적인 관계라면 가까우면서도 힘들었겠지요.
이제는 우리가 늘 경험할 수밖에 없는 지난한 여름 속에서 젊은 그네들은 즐거웠습니다. 우리의 젊음이 그곳 어느 곳에서 우리를 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젊은 그네들일 때 나누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지만
저쪽 끝에 가까워지는 젊은 청춘들은 새롭게 인생을 배워 갑니다.
소중한 사람과 공유하는 시간 속에선 흔히 말하는 추억이 생겨납니다. 추억에는 그것이 생겨날 당시의 온기가
묻어 있습니다 <이기주 보편의 단어>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 있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