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전문적으로 오르는 사람은 도인이다. 이번 ABC 트레킹을 다녀온 후 느낀 점이다. 어떤 사람을 산을 전문적으로 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모든 짐을 등에 메고 어떤 거처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야생의 산을 최소한 2주 이상 오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먹고 자고 생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오직 자신의 몸으로 둘러메고 걷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전문적인 산악인의 경우에는 세르파와 포터가 동행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칭송받는 이유는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등정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그 악조건을 참아내거나 극복하고, 자연의 허락을 받기까지 기다리며, 목표지점에 오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힘든 상황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일상 속에서는 마주치기 힘든 상황들을 묵묵히 견뎌내며 한발 한발 앞으로 전진하는 그들의 모습이 바로 도인 또는 수행자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을 유지하고, 주어진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단지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비록 내가 만든 기준이지만, 나는 이런 사람을 수행자라고 부른다. 평상시에는 크게 마음이 요동칠 일이 없다. 하지만, 일상에서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상황이나 자극이 발생하거나, 또는 자신의 뜻과 다른 상황과 사람을 맞이하면 마음이 흔들리며 힘들어한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좋아하는 것은 더 오래 붙잡고 싶어 하고, 싫어하는 것은 빨리 떨쳐버리고 싶어 한다. 이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니 화를 내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더 인간적이다. 하지만 도인은 다르다. 이미 자신의 범위를 벗어난 사람이기에 마음에 걸림이 없다. 자신이 특별히 원하거나 싫어하는 것도 없기에, 일반인의 시각에서 화를 내거나 웃는 상황이 닥쳐도 그냥 아무런 일도 없듯이 그날 할 일을 하고 평상심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일상의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도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나’ 또는 ‘나의 것’이라는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도인이라고 부른다.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는 말이다.
MBC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ABC에 오르기 시작했다. 비가 제법 많이 오고 고산으로 올라가면서 기온은 떨어지고 있었다. 앞사람의 걸음이 느리지만, 서두를 수 없는 상황이어서 앞사람의 걸음 속도에 맞춰 걸었다. 나의 속도를 유지하지 못하니 추위가 몰려오고, 비에 젖은 등산화와 등산복으로 인해 점점 더 추워졌다. ABC 트레킹을 하면서 처음으로 힘들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때 “왜 산사람은 산에 오를까? 그들은 왜 이 힘든 과정을 겪으면서도 산을 오르고 또 오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일상의 편리함과 안락함을 포기한 행위다. 일상의 편안함을 스스로 걷어차고 일부러 고행을 하는 찾아 나선다. 왜 그럴까? 자신의 관성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길을 꾸준히 걷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관성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상의 분주함에서 한가로움으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평온함으로, 사람과 상황과의 갈등에서 평화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잡념에서 무념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나’를 깨고 ‘큰 나’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일상의 익숙한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작은 나’를 깨는 과정에서 자신이 모르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고, 동행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도 있다. 또는 닭울음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은 한 수행자처럼, 일순간 마주치는 상황을 통해 자신의 본성과 마주칠 수도 있다. 익숙하고 안락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민낯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본성을 보며 ‘작은 나’의 틀을 깨기 위해 산에 오르고 걷는 것이 아닐까?
ABC 트레킹을 마친 지 일주일이 지나간다.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고작 일주일 정도 안전한 길을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고 편안하게 걷다 온 자신에게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그럼에도 한 두 가지 변화는 있었다. 비록 언젠가는 그 변화가 사라지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더라도 말이다. 우선 모든 것이 다소 늦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 감정의 변화나 마음 상태를 예전보다 조금 더 밀착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바로 대응하는 능력이 감소한 것이다. 바로 대응하지 않으니 갈등이 일어날 상황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변화가 한 가지 더 있다. 타인의 시선에 조금 둔감해졌고,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조금 더 솔직해지고 편안해졌다. 그만큼 나와 가까워진 것이다. 그리고 잘난 모습, 못난 모습, 모두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점도 뿌듯하다. 굳이 나를 감출 필요도, 과장할 필요도,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다. 그냥 나는 ‘나’ 일뿐이다. 이 정도면 ABC 트레킹은 매우 가성비 좋은 여행이 아닐까?
ABC 트레킹을 하면서 경험한 불편한 상황들, 즉 비, 바람, 추위, 사람과의 갈등, 열악한 환경,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 약 나흘간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 등은 모두 이 기회를 통해 일상의 편안함과 안락함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라는 히말라야의 선물이다. 그 불편함을 체득하기 위해 그리고 그 불편함을 통해 삶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상황에서 평온함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ABC에 왔고, 오직 자신의 의지와 발로 모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떠나기 전의 우리가 아니다. 그만큼 경험했고, 변화를 맞이했고, 변화된 시각으로 같은 세상을 다르게 살아갈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 도인이 되어가고 있고 이미 되었다. 축하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