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나 둘레길을 걷다 보면 오르막길이 보기 싫을 때가 있다. 더군다나 계단길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만큼 오르막길은 오르기 힘들다. 이제는 나이 들어가면서 내리막길도 힘들어진다. 내리막길을 걸을 때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한 대비로 다리에 힘을 많이 주며 걷기 때문이다. 오르막길이나 내리막길이나 쉬운 길은 없다. 평지는 또 평지대로 힘들다. 발의 같은 부위에 무게가 반복적으로 실리기 때문에 발의 피로도가 쉽게 온다. 그러니 이제는 어느 길이든 힘든 것은 마찬가지니 그러려니 하고 걸을 수밖에.
서울 둘레길 구간 중 오르막길이 많은 구간이 있다. 도봉산 구간, 관악산 구간, 앵봉산 구간이 그런 구간이다. 산길을 올라야 하니 오르막길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다. 언젠가 앵봉산 구간을 걷는데 잠시 뒤 돌아보며 쉬었다 걸은 적이 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무척 편안하게 걸은 경험이 있다. 그 이전에는 힘들 때 빨리 힘든 구간을 통과하기 위해 서두르거나 애쓰고 걸었다. 그래서 오르막길이 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오르막길을 잠시 쉬었다 걸으니 편안하게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하고는 힘든 길을 일부러 천천히 쉬면서 걷는다. 가끔 뒤돌아보며 지나온 길을 바라보기도 하고, 먼 산을 둘러보기도 하고, 때로는 주변 경치를 감상하며 걷는다. 이렇게 걷다 보면 힘든 구간을 별로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이번 ABC 트레킹에서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 힘들면 잠시 쉬었다 걸으면 된다. 무리해서 빨리 오르려 하면 할수록 힘만 더 든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천국의 계단(?)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언제 저 계단이 끝날까라는 조바심을 내면 낼수록 힘만 더 든다. 빨리 올라 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힘만 더 든다. 그냥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걸으면 쉽게 오를 수 있다. 조급한 마음을 다스리고 그냥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 보면 언젠가는 그 힘든 계단길도 끝이 난다. 시간은 여유롭고, 후미 가이드가 지켜주고 있으니 길을 잃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후미 가이드는 절대로 빨리 가라고 얘기하지도 않을뿐더러 우리의 보속이 아무리 느려도 절대 앞서 걷지 않는다. 그들만의 규칙이다. 길 잃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천천히 자연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고,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걸으면 저절로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ABC는 유난히 돌계단이 많다. 푼힐 전망대에 오르는 길도 그렇다. 높은 산이지만, 한 개 차선 도로 정도 넓이의 돌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어서 길은 무척 안전하다. 그 돌계단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예전의 고깃집에서 불판으로 사용했던 것처럼 반들반들하고 넓은 돌로 계단을 정비해 놓은 길이다. ABC에 오르는 길은 국내 어느 산보다 안전한 길이다. 굳이 바위를 타거나 밧줄을 잡고 오를 일도 없다. 다만 고산 지대이기에 고산병에 대한 주의와 추위나 비에 대한 준비만 잘하면 즐겁게 다녀올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아무리 안전한 길이어도 산의 높이가 있다. 푼힐 전망대의 고도는 3,210m이고, MBC가 3,700m이고, ABC가 4,130m이다. 날씨가 변덕스럽고 금방 해가 비치다 구름으로 가려지기 일쑤다. 그리고 계단길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올라도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길. 이 고비 넘기면 끝날 것 같은 계단길이 굽이돌아 다른 방향으로 이어진다. 조급한 마음을 갖는다면 쉽게 지칠 수 있고, 이 지치는 마음이 짜증으로 연걸된다면 ABC 도착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어느 구간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많이 지쳐있었다. 바로 앞에서 포터가 계단을 오르는데 너무 편안하게 오르고 있었다. 힘이 들어 아무 생각 없이 그의 발 뒤꿈치를 보며 걸었다. 그러다 그의 보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를 때는 올라가는 발의 발바닥이 모두 보였고, 그 발이 계단에 닿기 전에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잠시 허공에 머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평지를 걸을 때에는 옮기는 발의 발바닥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의 보법이 배울 만했다. 계단에 오르는 발을 바로 계단에 올리지 않고,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잠시 허공에 머문 후 계단에 올리는 보법이다.
몸은 지쳐있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그의 보법을 흉내 내며 계단을 올랐다. 생각보다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허공에 머무는 순간은 발에 대한 휴식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휴식 공간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보법을 익히며 걸었다. 아마 오랫동안 포터 일을 하며 저절로 습득된 보법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그 보법의 의미나 방법 또는 누군가에게 배웠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의 보법을 따라 하며 조금 쉽게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는 그의 보법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도 있다. 저절로 몸에 익은 습관이나 행동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포터 덕분에 계단길을 조금은 쉽게 오를 수 있는 보법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계단을 오를 때 종종 사용할 생각이다.
ABC는 매우 안전한 길이다. 다만 날씨에 대한 준비를 잘해야 한다. 로지 시설도 하룻밤 머물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식사도 한식 정도는 웬만한 로지에서는 모두 판매하고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잠시 발과 마음의 휴식 시간을 갖는다면 편안하게 이 길을 걸을 수 있고, ABC 일출인 gold trail의 장관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서두르지 않는 마음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마음속 휴식의 공간을 갖고 걷는 것, 이것만 있다면 이 길은 우리의 방문을 허용하고 우리를 받아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