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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Lodge)에 관하여

by 걷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알베르게가 있다면, ABC 트레킹 길에는 로지가 있다. 두 곳 모두 명칭만 다를 뿐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쉬고, 먹고, 잠을 자며 다음 날 걷기를 위한 준비를 하는 공간이다. 알베르게는 서양식 건물로 냉난방이 잘 되어 있고, 우리와 익숙한 서양식 화장실이고, 언제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 2층 침대로 꾸며져 있어서 많은 순례자들이 한 공간에서 잠을 잔다. 여성과 남성이 모두 함께 잠을 자는 공간이다. 반면, 로지는 냉난방 시설이 안 되어 있고, 변기는 좌식보다는 재래식이 더 많고 바닥은 타일이나 시멘트로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다. 방마다 크기에 따라 2인실, 4인실, 6인실 등이 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쓰였던 부분이 고산병, 추위, 로지의 시설 등이다. 워낙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기도 하고, 혈압약을 복용하고 있기에 혹시나 고산병과 혈압 간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여정 내내 고산병으로 힘들었거나, 로지의 시설로 불편함을 겪거나, 추위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보다는 비를 맞은 후 비에 젖은 등산화와 옷가지들, 장갑 등 트레킹에 필요한 장비의 문제로 인해 불편함을 겪었다. 지나 보니 그나마 없었다면 굳이 추억이 남을 일조차 없었겠다 싶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에도 가장 신경 쓰였던 부분이 바로 빨래였다. 걷기와 빨래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걷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음식, 수면, 빨래, 그리고 걷는 것 외에 없다. 음식과 잠 잘 곳도 길 위에 언제든 준비되어 있으니 신경 쓸 일은 없다. 다만 비에 젖은 빨래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로지는 대부분 2층 구조로 되어 있다. 좁은 부지에 가능하면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지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한 방에 두 명, 또는 여러 명이 들어가 잠을 잘 수 있도록 되어있다. 침대 시트는 깨끗하게 세탁이 잘 되어 있고, 두툼한 이불이 한 채씩 각 침대에 놓여있다.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오지 않기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안에 준비해 간 침낭을 덮고, 침낭 안에 보온병과 보온 물주머니에 따뜻한 물을 받아 몸 옆에 두고 자면 새벽까지 온기가 유지되어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다. 고산 지역으로 올라갈수록 물이 식는 속도가 빨라지지만 추위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다. 벽은 단열이 잘 되지 않고 방수가 잘 되지 않아 물이 새는 곳도 있다. 각자 준비해 간 옷을 입고 자면 별문제 없이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방 안에 옷을 걸어 둘 못이나 옷걸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로지 문 밖에 있는 빨랫줄이 그나마 비에 젖은 옷이나 우비 등을 널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화장실은 수세식이고 안에 물통과 수도가 있다. 용변을 본 후 물을 내려 처리할 수 있다. 가끔 좌식 변기도 있지만, 대부분 재래식 변기다. 그리고 변기 주변은 타일이나 시멘트로 깔끔하게 깔려 있어서 사용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화장실 옆에는 어느 곳이든 반드시 수도와 세면대가 준비되어 있다. 방문객들의 위생을 위해 준비한 시설인 듯하다. 지프차로 이동할 때도 가끔 공중 화장실에서 쉬게 되는데, 이때 들린 화장실 역시 외국인 전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로지의 시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불편함이 없다.

로지에는 숙소 외에 식당과 주방이 있다. 그리고 매점이 이 안에 있는 경우가 많다. 식당은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넓은 탁자가 여러 개 놓여있다. 가끔 식당 안에 난로가 있는 경우도 있는데, 고산으로 올라가면 이런 시설조차 없다. 아마 연료 공급의 문제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식당 공간은 트레커들뿐만 아니라 가이드나 포터도 함께 쉬는 공간이다. 때로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기도 하고, 카드 게임 같은 것을 트레커들과 함께 하며 어울리기도 한다. 로지를 운영하는 사람, 음식을 만드는 사람, 가이드나 포터, 트레커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공간이다. 현지인과 외지인이 함께 어울리는 중요한 공간이다. 트레커들끼리 길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하는 사교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매점에서 필요한 간식을 구입하기도 하고, 때로는 간식을 구입해서 포터나 가이드에게 감사의 표시를 전하는 공간이기도 한다. 단순히 트레커들만을 위한 잠자는 공간이 아닌, 이 길을 걷거나 트레커들을 도움 주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다. 그러기에 로지 안에서는 서로에 대한 배려와 친절,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로지에서 와이파이를 구입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일정 금액을 지불한 후 핫 샤워를 할 수도 있다. 전체 일정 중 단 한번 핫 샤워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느끼는 충족감이나 행복감은 트레킹 이상의 것이었다. 단순한 따뜻한 물 샤워에 감동을 받는 것은 이 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일 수도 있다. 로워시누아 로지에는 세탁 서비스가 된다고 영어로 쓰여있는 것을 보았다. 실제 사용해보지는 않았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에도 가끔 돈을 내고 세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늘 사람이 붐벼서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이 로지에는 아주 멋진 카페도 있다. 산 위의 카페에서 고산과 깊은 계곡을 바라보며 마시는 아메리카노와 과일 주스의 맛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아마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런 멋진 광경을 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은 매우 드물 것이다.


걱정했던 고산병, 추위, 로지의 시설 등은 결국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고 지나갔다. 그보다 비에 젖은 등산용품을 말리는 것이 더 큰 숙제였다. 입은 옷을 며칠 째 입기도 하고, 젖은 옷은 비닐에 쌓아 가방 깊숙한 곳에 넣고, 준비해 간 다른 옷을 입고 걸으면 된다. 젖지 않은 옷이 그렇게 고맙게 느껴지는 것을 보며 참 사람은 단순한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서울에 지내면서 깨끗하고 건조된 옷을 입는 것이 고맙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뜨거운 물에 대충 몸을 씻는 것이 주는 행복감을 느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낯선 환경에 자신을 던지는 이유는 바로 이러 사소한 행복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닐까? 낯선 환경의 불편함을 통해서 일상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아이러니. 그러니 결국 불편함은 행복감을 만들어주는 좋은 방편이 된다. 일상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ABC 트레킹을 권하고 싶다. 일단 한번 다녀오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과 공간, 그리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수많은 행복이 늘 우리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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