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의 고도는 해발 4,130m다. 아마 예전에는 여기까지 가는 길도 눈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MBC(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부터 겨우 눈을 만날 수 있었다. 더구나 우리가 ABC에 오르는 날은 하루 종일 비가 와서 눈이 많이 녹았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MBC에서 ABC를 향해 걸었다. 약 4,000m 지점에 이르니 눈이 제법 쌓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나마 며칠 전에 눈이 내려서 볼 수 있다고 했다.
온몸이 비에 젖었다. 등산복도 젖고, 등산화 속의 양말까지 젖은 상태에서 걸으니 무척 추웠다. 내 뒤에 따라오는 포터는 얇은 비닐로 짐을 보호하며, 추위에 떨면서도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매우 안쓰러웠다. ABC 도착 약 200m 전에, 가이드 한 명이 뜨거운 생강차가 든 보온병과 찻잔을 들고 뛰어 내려와서 우리에게 따뜻한 생강차를 따라주었다. 그 생강차는 일반 생강차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생명수이자 감로수였다. 나는 떨면서 그 차를 마셨고, 그때부터 힘을 내어 ABC에 올랐다. 그 가이드는 나를 뒤따라오던 포터와 임무 교대하며 포터를 대신해 주었다. 이런 따뜻한 배려가 너무나 고마웠다.
ABC 표지판 앞에 잠시 멈춰 서서 표지판과 설산을 바라보았다. 비록 추위에 떨면서 서 있었지만, 그 잠깐의 순간에 드디어 ABC에 도착했음을 느껴 보았다. 표지판에는 “NAMASTE, ANNAPURNA BASE CAMP (ABC 4130 Mtrs) Warmly Welcome to all Internal & External Visitors”라고 쓰여있다. 감동은 잠시, 다시 추위가 몰려왔다. ABC에 도착해서 따뜻한 생강차를 한잔 더 마시며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가 젖은 옷가지와 짐을 정리했다.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 ABC에 도착했다. 아무런 사고 없이,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모두 무사히 도착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도 있었지만, 우리를 도와준 사람들 덕분이다. 끝까지 맨 뒤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우리를 지켜 준 포터에게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생강차를 들고뛰어 내려와서 포터와 임무 교대를 해 준 가이드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틀 내내 비가 내리더니 다음 날 새벽에야 비가 멈추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옷을 잔뜩 끼어 입고 아이젠까지 착용하고, 일출을 볼 수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고도도 높고, 바람도 불고, 설산이 뿜어내는 한기도 있어서인지 ABC의 새벽은 추웠다. 우리 일행 외에도 많은 사람이 일출 명소로 걸어오고 있었다. 전날 밤, 이 사람들이 모두 ABC에 머물렀다고 생각하니 그 열정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과연 일출을 볼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ABC에 오지만, 일출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틀 내내 비를 맞은 우리를 위해 안나푸르나는 일출을 보여주기로 작정했는지, 어느 순간 안나푸르나 주봉 윗부분부터 서서히 금색으로 변하며 아래로 내려왔다. 해가 떠오르며 설산이 황금산으로 변했다. 능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황금빛 길이 열렸다. 사람들은 이 길을 Gold Trail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보기 위해 대한민국에서 네팔까지 왔다. 이틀 동안 이동하고 나흘 동안 걸어서, 드디어 이 장엄한 풍경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행운아다. Gold Trail을 보았기에.
고통 뒤에 찾아오는 행복과 희열이 있다. 오르기 위해 힘들었고, 비를 만나 힘들었고, 추위를 만나 힘들었다. 하지만 Gold Trail을 보며 힘듦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억지로 강요당한 고통이 아니었다. 스스로 자신을 고통 속에 던졌고, 그에 대한 보상도 스스로 받았다. 결국 삶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안나푸르나에 온 것도 자유 의지고, 포기하지 않은 것도 자유 의지고, 그 과정에서 겪은 모든 고통도 자유 의지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받은 보상도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보상이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다. 해는 늘 뜨고 진다. 오직 ABC에 오른 사람만이 Gold Trail을 볼 수 있다.
이 장면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안나푸르나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설산이 점점 줄어드는 게 안타까워 매년 설산을 찾는다고 한다. 그들의 사랑과 열정에 찬사를 보낸다. 반면, 그들에 비해 나의 감동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아마 감정이 많이 무디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도 마음의 여유가 부족해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웅장한 자연의 모습과 황금산으로 막 변했을 때의 순간에만 겨우 ‘와, 아름답다!’를 느꼈고, 그것이 끝이었다. 더 이상 감동이 몰려오지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성 수치가 평균보다 낮고, 재미와 감동도 없는, 무색무취한 사람인가 보다.
아침 식사를 한 후에 ABC 표지판 앞에서 개인 사진과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 순간, 이 장소는 전쟁터처럼 변한다. 누가 먼저 앞에 서는가에 따라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 우리는 일행이 많다 보니 개인 사진과 단체 사진을 찍으며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출 보고, 인증 사진 한 장 찍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왔으니 말이다.
전날은 온몸이 비에 젖고 추위에 떨어서인지, MBC에서 ABC로 올라가는 길이 멀게 느껴졌고 걸으면서 본 작은 호수는 그냥 지나쳤다. 다음날 내려오는 길은 추위가 풀리고 몸이 더워지고 땀도 나기 시작해서 겉옷을 벗었고, 조금 더 내려와서는 아이젠도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걸었다. 전날과 달리, 멀게만 느껴졌던 MBC가 가깝게 느껴졌다. 특히,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의 반영이 거울처럼 비친 작은 호수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ABC, MBC, 그리고 그 중간쯤에 있는 작은 호수는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 따라 멀게 또는 가깝게 느껴지고,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자연은 늘 그 모습 그대로인데, 우리의 마음 변덕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다. 우리가 ABC에 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이런 진리를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 아닐까? 확인하고 체득하면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세상사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