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워 시누아에 머물 때였다. 늦은 저녁 시간에 한 무리의 한국사람들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내려왔다. 당일 아침 ABC에서부터 걸어서 시누아까지 내려온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축하를 보내며 동시에 ABC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물어보기도 했다. 특히 눈은 얼마나 쌓였고, 기온은 어떻고, ABC 상황은 어떤지 등에 관한 질문들을 했다. 우리가 곧 오를 길이기에 걱정과 불안감을 안고 물어본 질문들이다. 그들을 보며 무척 부러웠다. 다음 날 우리는 데우랄리까지 걷고, 그다음 날 ABC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로워 시누아에서 데우랄리까지 걷는 코스는 계단이 많고 이번 일정 중 가장 힘든 코스라고 한다. 로워 시누아에서 ABC 까지는 이틀 간에 걸쳐서 올라가는 데. 하산 시에는 하루 만에 내려와야 한다. 이 코스도 10시간 이상 걸어야 하기에 힘든 코스다. 이들은 이미 ABC에 올랐고 로워시누아까지 내려왔으니, 이들의 ABC 트레킹은 이미 완료되었다. 아직 ABC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그들이 대단해 보였고, 여유로운 표정과 미소도 부러웠다.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올랐던 사람들을 부러워한다. 반면 일단 올랐던 사람들은 오르는 일이 별일 아닌 듯 얘기한다. 이것은 오만이 아니다. 이미 올랐기에 큰 일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부러움과 동시에 불안감을 지니고 있지만, 일단 올랐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아닌 듯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있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분명한 목적이 있기에 의욕이 넘치고 애를 쓰며 살아간다. 그런 모습은 온몸과 표정, 그리고 태도에서 드러난다. 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 사람은 이미 이루었기에 여유롭고 부드럽고 편안하다. 목적을 달성하기까지는 앞뒤 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야 하지만, 일단 이룬 후에는 뒤도 돌아보고 주변도 살피며 여유로운 발걸음을 할 수 있다. 분명히 같은 사람이지만, 오를 때의 마음가짐과 내려올 때의 마음가짐에는 차이가 있다.
ABC를 완보한 이들의 여유로움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모습과 이미 다녀온 지금의 모습은 다르다. 또한 ABC 다녀온 후 축하한다는 얘기를 듣거나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얘기한다. 사실이 그렇기에 그렇게 얘기한다.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아주 힘들거나 어렵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미 과정의 힘든 일조차 멋진 추억으로 남아있다. 산티아고 길을 마치고 순례 인증서를 받으러 갈 때도 그랬다. 한 달간에 걸쳐 800km를 걸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인증서를 받기 위해 마음이 급해졌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급히 간다고 받고, 천천히 간다고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마음만 급해졌고 그만큼 발걸음도 빨라졌다. 받으러 가는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서 모두 얼굴에는 피곤함과 긴장감이 묻어났고 걸음이 빨랐다. 반면 받고 나온 사람들의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발걸음에는 느긋함이 느껴졌다. 그들이 인증서를 손에 들고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웠는데, 막상 내가 받고 나오니 그 부러움은 사라졌고, 반면 반대편에서 인증서를 받기 위해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증서 받기 전 나의 모습과 같았다.
삶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애를 쓰며 살아가야만 하는 때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도 있다. 그 이유가 개인적인 일이든, 가정을 위한 일이든, 또는 사회를 위한 일이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달렸던 시절이 있다. 그 시간을 뒤로하고 인생 2막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는 그렇게 애쓰며 살아가지 않아도 되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자신을 힘들게 만들며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손을 꽉 움켜쥐고 살아갈 필요도 없고, 조급한 마음과 성취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살아갈 시기도 지났다. 오히려 잡았던 것도 놓아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함께 어울려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때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한 구석에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이루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쥐려고 노력하고, 때로는 놓으려고 애쓴다. 이 두 가지가 늘 부딪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조금씩 놓으려는 마음에 무게를 실어가며 중심점 이동을 하고 있다. 언제나 이 삶의 무게를 모두 벗어버릴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길을 걸으며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걸을까? 아니면 무언가를 내려놓기 위해 걸을까? 아니면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고민하고 정답을 찾기 위해 걸을까? 각자 걷는 이유가 다르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삶의 무게를 덜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러움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변하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굳이 비교하며 살아갈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자신만의 발걸음과 속도와 방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