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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장’은 ‘김낙수’가 아니다

by 걷고

제목이 궁금해서 가끔 보는 TV 드라마가 있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다. 이 제목에 이 드라마의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서울에 자기 집을 갖고 있고, 대기업에 다니며, 임원 승진을 하지 못해 명예 퇴직 한 50대 초반의 가장과 그 가족이 겪는 삶을 아주 자세하고 적나라하게 풀어내고 있다.


어제는 그 ‘김부장’이 자기 자신인 ‘김낙수’와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김낙수’는 아직 ‘김부장’과 헤어지지 못하고 ‘김부장’의 자존심을 지니며 살아간다. ‘김낙수’의 삶은 없고 오직 ‘김부장’의 삶만 있다. 형의 카센터에서 세차를 하면서도, 대리기사를 하면서도, 아랫 동서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대기업 부장이라는 자존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분양 사기까지 당하는 일도 겪는다. 생활을 위해 아내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부동산 사무실에서 근무하며 돈 100만원 때문에 상사와 말다툼할 때도 그는 ‘김부장’이었다. 아내가 집을 팔려고 할 때도, 집은 ‘김부장’의 자존심이자 모든 것이고, 가정을 지키는 요새라며 팔지 말라고 한다. 아내는 ”그 알량한 자존심 언제까지 갖고 살아갈래“라며 일침을 가한다. 드디어 ‘김부장’과 ‘김낙수’가 솔직하게 대화를 하며, ‘김부장’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김낙수’가 되어 현실을 직시하며 ‘김낙수’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모든 사회생활을 접은 후 나도 ‘김부장’이었다. 과거의 자신이 뭔가를 이루었거나 특출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늘 뭔가를 추구하는 그 ‘알량한 자존심’이 있었고, 그 자존심을 가장이라는 역할과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포장하며 살아왔다. 어제 ‘김부장’이 ‘김낙수’에게 “행복하게 살아라”라며 결별을 선언할 때, 그 선언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며,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이미 경험했기에 그 의미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과거의 영광(?) 또는 과거의 기억에 묻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만나는 사람들도 과거 직장이나 사회생활 때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의 호칭은 여전히 ‘김부장, ’김사장, '김교수‘, ’김판사‘이다. 과거와 아름다운 이별을 하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그 과거는 단순한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 과거는 지금의 자신을 지탱시켜주는 동아줄이다. 과거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이 자신인 줄 알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애잔하고 안타깝다.


‘김부장’은 ‘김낙수’에게 이제는 ‘김낙수’로 살아가라고 인사를 건넨다. ‘김낙수’는 누구이고 무엇인가? 대기업 부장, 가장, 아빠, 남편이라는 가면과 역할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김낙수’가 본 모습을 드러낸다. 즉 ‘김부장’에서 ‘김낙수’의 본 모습이 아닌 것들을 제거하면 ‘김낙수’가 저절로 나타난다. ‘김부장’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가장이나 남편, 아빠의 역할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김낙수’가 살아난다. 그 가면이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가장을 만들어 준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어느 시점이 오면 그 역할에서 벗어나 참다운 자신을 만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과거에서 벗어나 지금을 살아갈 수 없다.


퇴직하거나, 사회 생활을 정리한 후 방황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 주된 이유가 자신이 누구인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왔고, 가장으로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과 책임감 때문에 이에 대해 생각할 틈 조차 없이 살아왔다. 물론 개인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에 각자 자신을 찾아가는 방법이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바로 현실을 직시하며 ‘지금-여기’를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니체는 “각자 소명이 있다. 그 소명은 오늘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오늘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지혜다. 만약 그 과정에 문제나 역경이 찾아온다면, 이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소명이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우리에게 베풀어주는 선물이다.


나는 오늘도 걷고 글을 쓴다. 명상을 하며 책을 읽는다. 내담자를 만나게 되면 상담을 한다. 한 가지 큰 변화가 있다면 이 모든 것을 억지로 하거나, 일부러 하거나, 어떤 목적을 갖고 하지 않는다. 그냥 밥 먹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가족과 함께 지내며 가족에게 찾아온 모든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가끔 과거나 미래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금방 지금-여기로 돌아올 수 있는 마음챙김을 하며 살아간다. 나는 ‘김부장’의 삶에서 해방되어 ‘김낙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참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은 ‘김부장’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김낙수’로 살아가고 있나요? 행복한 삶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바로 ‘김낙수’로 살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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