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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욱 Aug 24. 2024

결승선이 눈앞에 있어

- 6

  중학생이 될 때까지 나는 다섯 개의 상을 받았어. 이제는 더 이상 받기 싫어 도망치지도 않았지. 하지만 여전히 사라질 수는 없었어. 방학이었어. 연습을 쉬는 날에도 나는 홀로 운동장을 달렸어. 혼자 연습할 때는 항상 맨발로 달리기를 했어. 달릴 때마다 발바닥이 따끔거렸지. 그 따끔거림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내가 사라지는 순간이 될 거야. 그날은 이상하게 집중이 되지 않았어. 나는 무엇도 아니었어. 폭탄도 아니었어. 바람을 파고들지도 못했어. 항상 결승선만 바라보고 있었어. 그 너머를 보지 못했어. 내 자신에게 화를 냈어. 너는 도대체 애가 왜 그러니. 왜 간절해지지 않는 거야. 벤치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어. 이상했어.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슬럼프일까.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어. 아픈 곳도 없었지. 가족들을 생각하면 이럴 시간이 없는데. 나는 하늘을 보며 외쳤어. 여러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적막.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았어. 진짜 중요한 문제는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 처음으로 외롭다는 생각을 했지. 기분이 찐득찐득했어. 무더운 날 발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아스팔트처럼. 발바닥 밑으로 개미가 한 마리 지나갔어. 나는 가만히 바라봤어. 내가 너무 커. 멍했지. 정말로 쉬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 이렇게 쉴 때가 아닌데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 어쩌면 이건 말로만 듣던 고독이란 걸까. 결핍이란 걸까.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어. 처음 있는 일이었지. 감독님 생각을 했어. 그녀가 나를 위해 깃발을 흔들어주면 좋겠어. 내가 달릴 수 있도록. 고개를 들었을 때, 운동장 구석에 마련된 육상부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어. 환했어. 나는 그녀의 컨테이너로 향했지. 천천히 걸었어. 옥상에 선 날 이후 처음이었어. 인생에는 속도를 늦춰야 할 때도 있는 법이란다. 그녀의 말뜻을 조금은 알 수 있었어.

  그녀는 방에 있어야만 해. 꼭. 내가 왔으니까. 두려웠어. 다른 누군가 있을 것만 같았어. 그래도 결국 나는 그녀의 방 앞에 섰어. 아니, 서야만 했지. 문고리를 잡았어. 천천히 손아귀에 힘을 주었지.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어. 눈을 찌푸렸어. 목소리가 들려왔지. 아가 왔구나. 사백 미터 사건 이후로 그녀는 언제나 나를 아가라고 불렀어. 나는 웃을 수 있었어. 감독님. 그녀의 눈은 붉었어. 감독님, 울었나요? 그녀의 책상 위에는 소주병이 있었지. 가끔은 너무 답답해서 술을 마신단다. 나는 입을 앙다물었어. 또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구나. 이리 와 보렴. 그녀의 곁으로 가. 감독님 저도 술을 주세요.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어. 답답해요. 자꾸만 감독님 생각이 나요. 그래서 저는 느려져요. 그녀는 잠자코 술을 마셨어. 무슨 말이든 해 보세요. 감독님이 웃었지. 무거운 웃음이었어. 마음속에 성에가 낀 것 같았어. 저는 더 이상 무거워지면 안 돼요. 당신 때문에 저는 지금 무거워요. 그녀가 나를 옆에 앉혔지. 손을 허벅지에 얹고는 쓰다듬었어. 야릇했어. 가슴이 두근거리는데도 마음이 편했어. 나는 처음 알았어, 세상에는 그런 기분도 있더라. 달리기를 할 때 상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보렴. 이미 귀에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어. 상체는 문제없어요. 제가 알아요.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잠자코 나를 바라봤어. 그 침묵이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했지. 몸을 끝까지 기울여야 해요.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넘어질 것같이, 아슬아슬하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어. 그래, 달리기라는 것은 말이야 상체를 기울일수록 빨라지지. 그리고 빨라질수록 더 기울어진단다. 소주병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그녀가 내 손을 쳐냈어. 저도 술이 필요해요. 제 문제는 상체가 아니라고요. 감독님은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지. 나는 빨랐단다. 누구보다도. 마치 너처럼. 그건 딱 네 나이대의 일이었어. 연습을 하던 중에 발을 헛디뎠었지. 컨디션이 정말 좋은 날이었는데. 병원에서는 적어도 두 달은 쉬어야 한다고 했지. 근육이 피로하다더구나. 그리고 그 기간 동안 가슴이 이렇게나 커져 버렸어. 단 두 달이었는데 말이야.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어.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거렸어. 감독님은 여잔데도 말이야. 나는 더 이상 상체를 기울일 수 없었단다. 기울이면 자꾸만 넘어졌거든. 그녀는 목이 메는 듯 말을 잇지 못했어. 모두에게 그래요. 불행은 마하의 속도로 우리를 지나쳐요. 남는 건 가슴 같은 것들뿐이죠. 나는 그녀가 울도록 놔두었어. 그런 건 위로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 나도 누군가 가족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불쾌해졌으니까. 결국 내 달리기는 사 등으로 끝났어. 이런 건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지. 나는 그녀의 가슴에 손을 올렸어. 몽글몽글 기분이 좋았지. 메모리폼 베개처럼 부드럽지만 야무졌어. 하지만 나는 감독님의 가슴이 좋아요. 추하지 않아요. 이렇게나 크고 따뜻한 걸요. 내가 뛸게요. 감독님을 대신해서 더 빨리 뛸게요. 누구보다도. 사라질 정도로. 그녀가 몸을 돌려 나를 안아 주었어. 이리 오렴, 아가. 나는 그녀의 가슴에 안겼지. 그녀가 말했어. 아가야, 절대로 사라지거나 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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