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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설명회장에서 다시 만난 독일

by 지뉴

딸이 고등학생이 되고 난 후 교육제도에 부쩍 관심이 늘고 있다. 한때 고등학교 교사로 교육현장에 몸 담았고, 학부모로 산 지난 십 년 가까운 세월이 있었건만, 이제야 이러고 있는 내가 좀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어쨌든 늦었다는 인식조차 없이 지내는 것보단 나을 테니, 진짜 늦은 건 아니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의 현실에 임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가 되고 보니, 교사의 입장으로 접했던 교육 현실에서와는 또 다른 생각과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어 수행평가에 대해 말해보자면,

교사로서의 나는 한 학기에 끝내야 할 교육과정에 쫓기며 조바심을 냈고, 어떻게든 정해진 기한 내에 모든 아이들이 수행평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었던 듯하다.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없는 그 많은 과목들의 수행평가를 동시다발적으로 치러내야 하는 아이들의 지친 얼굴에 마음이 쓰이면서도, 학생으로서 해내야 할 의무이니 어쩔 수 없진 않나,라는 생각이 강했다. 한 학기 동안 한 과목당 몇 번씩 치러내야 하는 수행평가니, 아이 한 명이 통과해야 하는 시험은, 지필평가까지 합치면, 학기당 수십 번은 족히 될 것이다.


수행평가에 대한 진심과 열의가 다소 부족해 보이는 내 딸아이조차, 매일 아침 무덤에서 갓 나온 시체 같은 표정으로 하루를 시작해, 죽었다가 몇 번은 되살아난 좀비 같은 몸짓으로 귀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곁에서 지켜보기가 애처롭다. 오죽하면 아침 여덟 시가 되기 전 등교해 야자를 마치고 밤 열 시가 넘어 하교하던, 그 옛날 별 보기 운동을 하며 학교를 다니던 내 학창 시절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까. 과거의 일이라 어느 정도 그때의 현실이 미화된 면이 있다 치더라도, 쉼 없이 시험에 시달리는 지금보다는 확실히 심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자고로 삶이 주는 버거움이란 몸보다는 정신에 더 깊이 관여되는 것일지니.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녀온, 고교학점제와 새로운 대학입시 관련 설명회장에서도 나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강연자는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설명회에서 수십 쪽에 이르는 내용을 조목조목 상세히 전달했고, 그 자리에 있던 학부모들은 마치 성실한 학생이 된 듯 필기를 하고 모니터상의 내용들을 사진으로 찍어가며 세부사항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아이의 입시가 곧 학부모의 입시인 이곳에서 지극히 당연한 풍경일 것이다. 어쩐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수능 백일 전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절절한 백일기도의 장면들이 스쳤다.


내가 기억하는, 강연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요점은 이랬다.

1. 문이과 계열 선택은 1학년 첫 학기에 마쳐야 한다.

2. 가고자 하는 전공을 가능한 일찍 결정해서 그에 도움 될 만한 선택 과목들을 계획적으로 이수해야 한다.

3. 수학에서 미적분II 기하학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지만, 전체적으로 아이들이 해내야 할 과제들은 늘었다.

4. 내신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바뀌면서 내신의 변별력이 줄었기에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출석률을 유심히 지켜본다. 고로, 결석을 피하고 아프더라도 학교에서 아파야....


'아프더라도 학교에 나와야 한다'라는 강연자의 말을 들으면서 내 마음이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에게서 나온 이런저런 말들이 필터에 걸린 것처럼 귓가에서 덜거덕거렸다. 개중 가장 크게 신경 쓰였던 건, 대학의 서열화를 강조하는 듯한 표현.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였다. 그는 설명회 중 이 말을 습관처럼 여러 번 언급했는데, 학부모들의 관심과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일종의 방책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즈음 내 마음은 삐딱선을 넘어 안드로메다로 향해 가다가, 최근 딸이 내게 한 말에 이르렀다.


얼마 전, 네가 진짜 해보고 싶은 일이 뭐야,라는 내 질문에 딸은 5개 국어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3개 국어도 4개 국어도 아닌, 자그마치 5개 국어를. 그때는 커다란 감탄사 하나를 토해내면서도 딸의 말을 그다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지금 이 시점에 딸의 대답이 내 귀의 필터를 가뿐히 통과하여 귓속에서 계속 울려대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딸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독일에 가보고 싶다고 덧붙였더랬다.


안 그래도 근래에 김누리 교수의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를 읽고 독일의 교육제도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는 터인지라, 나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딸의 말이 몹시도 반가웠다.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우고, 대학에서 독일어를 복수 전공하면서 독일에 대한 매력을 많이 느꼈던 그 시절의 내가 소환되었다. 그러자 나를 찾아온, 이렇게 나와 독일의 인연이 다시 닿게 되는 것일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첫사랑을 다시 만난 듯 가슴이 울렁거렸고, 내 마음은 이미 콩밭이 아닌 독일의 어느 도시를 거닐고 있었다.


아이를 위한답시며 참석한, 학부모를 위한 설명회장에서 나는 그렇게 다시 고등학교와 대학생이었던 청춘의 나로 되돌아가 들뜬 마음이 되어버렸다. 물론, 설명회를 마치고 돌아와 딸과 제법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고, 결국 몇 년 만에 다시 사교육의 힘을 빌려 수학과 좀 더 친하게 지내보자 약속했지만, 나 또한 다시 공부하고픈 욕심이 되살아났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독일어를 말이다.


불현듯 내가 처음으로 익혔던 독일어 표현, 가수 신승훈의 노래 가사에 등장했던 'Ich liebe dich.'가 깜빡깜빡, 머릿속에서 점멸하는 것 같다.

공부하기에도, 사랑에 빠지기에도 딱 좋은 계절 오월이다.

언젠가 딸과 항께 이 거리를.. Sprechen Sie deu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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