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지문이 닳지 않을까 싶을 만큼 손꼽아 기다려온 방학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마도 기뻐하는 학생들만큼, 아니 그 이상 행복해하는 이들이 교사일 것이다. 삼시 세끼 챙겨야 할 생각에 부담감도 고민도 깊어지는 이들이 학부모라면.
'더위를 피해 수업을 쉰다'는 여름 방학의 취지에 맞게 교사들은 몇 주간 대면수업은 내려놓고 휴식과 자기 계발, 다음 학기를 준비하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학교 수업에서 벗어나 학원으로 내몰린 아이들은 선행학습으로 인한 학업의 무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만 해도 여름 방학은 '추리소설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시기'와 동의어였고, 다음 학기 진도는 당연히 방학을 마친 후에 시작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건만. 그래도 여전히 ‘방학’이라는 단어가 선사하는 자유로움이 있다.
교무실 책상 정리를 하는 동료교사들의 얼굴에는, 독립을 맞은 식민지 국가의 국민 같은 표정이 어려있다. 더 이상 필요 없을 서류들을 정리하고 구석구석 숨어있는 먼지를 말끔히 닦아내는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인다. '교사에게 방학이 없으면 (정신적) 병이 날지도 모른다'라는 자조 섞인 말 끝에 맞은 방학이니 그들의(우리의) 모습이 넘칠 만큼 이해가 간다.
아이들에게도 방학은 책상 서랍을 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평소 저장강박증에 걸린 사람마냥 온갖 잡동사니들을 서랍 속에 쑤셔 넣던 녀석들도 이날만큼은 정리의 달인이 된다.
"서랍 속이 깨끗하게 치워진 사람부터 확인하고 귀가시킬 거야."
이 말 한마디에 열 번의 잔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아이들이 일사천리로 서랍을 비워낸다. '귀가'의 달콤함은 힘이 세다. 그만큼 아이들이 한시라도 빨리 학교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크다는 얘기일 테다.
"쎔, 제 책상부터 봐주세요. 완전 깨끗해요!”
치우는 것과는 담쌓고 지내던 J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씩씩하게 소리친다. 설마, 하며 서랍 속을 들여다보니 정말 '완전히' 말끔해진 모습으로 J의 서랍 속이 탈바꿈해 있다.
쉬는 시간, 낯익은 얼굴 하나가 교무실로 들어온다. 지난 며칠간 '특별교육'을 이수하고 돌아온 옆반 남학생 M이다. 평소 수업 시간 산만하고 주위 친구들을 들쑤시며 수업방해가 심한 M은, 급기야 교사 면전에서 비속어를 내뱉고, 문을 걷어차는 행패를 부리다 수업에서 배제되어 특별교육을 이수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모양이었다.
그런데 웬일일까, 한동안 학교를 떠나 있었던 M의 표정이 너무나도 밝다. 심지어 담임교사와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는 나긋나긋, 상냥하기까지 하다. 특별교육을 이수하는 동안, 함께 특별교육을 받는 다른 친구들이 아침에 지각하지 않도록 본인이 매일같이 모닝콜을 하며 챙겼다고 자랑을 하는데, 그간 M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자부심이 뿜어져 나온다. 이제껏 내가 보아온 M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 같다.
M이 오래간만에 들른 교무실에서 즐겁게 떠들고 간 뒤, 동료교사 한 명이 M에 관해 M의 담임교사에게 한 마디 건넨다.
"애가 달라 보이는데요?! 그곳이 체질에 맞나 봐요.”
"평소 M은 학교를 감옥처럼 느끼는 것 같아요. 아마도 그래서..."
그러니까, 방학을 맞은 교사들이 신생독립국의 국민이 된 듯 해방감을 느끼는 것처럼, M도 학교를 벗어나 특별교육을 받으러 간 그곳에서, 그간 잠들어 있던 자신의 상냥함과 부드러움을 일깨울 정도로 묵혀왔던 어떤 감정이 해소됨을 느꼈던가 보다.
그러자 드는 생각, 어쩌면 저 아이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도 있겠다는 것. 역사적으로도 학교 부적응자였던 큰 인물들이 꽤 있질 않았나. 에디슨도, 빌 게이츠도 학교가 차마 품어주지 못했지만, 학교 밖에서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키워내고 성장했다.
언뜻 포로수용소를 연상시키는 학교라는 획일적 공간. 그 안에서도 다양성을 지키고 길러주는 것이 가능하겠으나, 21세기형 인간에게 그 가능성이란 아주 제한적이지 않을까. 여전히 주입식 교육이 학교 수업의 주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이토록 다양한 아이들을 학교가 '수용'이 아닌 '포용'을 통해 껴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자신만의 사유를 즐기고, 틀에 갇힌 생활을 참아낼 수 없을 만큼 본인의 개성이 강한 아이들을 학교라는 제도권 안에 욱여넣는 것만이, 그들을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최선의 길은 아닐 터이고.
이 모든 아이들을 이끌고 통제해야 하는 교사들에게도, 학교를 숨 막혀하는 아이들에게도 방학은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가벼움을 일단은 즐기고 볼 일이다. 비록 새 학기와 함께 다시금 고민이 깊어질지라도.
오늘은 귀가 전 꼭 들러보고 싶은 곳이 있다. 내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이 보였던, 하지만 이런저런 상황으로 지척에 두고도 그동안 미처 가보지 못한 곳. 만 삼천여 권의 책이 나를 맞아줄 학교 도서관에 들러 잠시, 그러나 여유롭게, 그간 깊었던 갈증을 시원하게 날려 보리라. 여름철, 짱짱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책탑을 곁에 끼고 삼매경에 빠져드는 독서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소확행이니, 이번 학기의 마지막 풍경으로 이보다 더 이상적인 것이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