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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와 경쟁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by 지뉴

누군가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2022년 반클라이번 결선에서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보여준 연주라고 말할 것이다. 클래식에 대해 전문적 지식 없이, 감성이 이끄는 대로 간헐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연주를 보러 가는 청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연주가 왜 훌륭한지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무어라 답할지 몰라 허둥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가 반클라이번에서 들려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이, 이제껏 내가 보고 들은 그 어떤 클래식 연주보다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을 선사하며 가슴을 뒤흔들었고, 숭고하고 경이로운 감동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결코 멋진 기교나 정확한 타건만으로는 불러일으킬 수 없는 감정이었다.


열여덟의 임윤찬이 들려준 라흐마니노프에는, 이 연주가 경쟁을 본질로 하는 콩쿠르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게 할 만큼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 작곡가에 대한 헌사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 '콩쿠르'는 애초 '그 기능의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경연회'(네이버 사전 참조)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뛰어든 경쟁이었지만, 그 자리에서도 임윤찬은 일등을 하겠다는 욕심을 제쳐 두고 음악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채,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에 오롯이 자신을 내맡겨 많은 이들에게 숭고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 사실은 콩쿠르 직후 이어진 각종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그의 연주에서 내가 받았던 느낌이 틀리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인터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숲으로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 싶다'라고 했던 그의 말이다. 당시의 나는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진 그의 아우라를 숲에서 도를 닦으며 해탈한 도인의 모습에 포개어 보며, 그의 열정이 참으로 순수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런데 최근 이탈리아의 한 매체에 실린 그의 인터뷰를 접하고선, 숲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그의 말이 단순히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체는, 올여름 이탈리아 공연을 앞두고 이루어진 임윤찬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고 전했다.

Q) 지금은 손민수 선생님과 함께 보스턴 음악원에서 공부하고 계십니다. 한국이 그리우신가요?
- 아니요.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부 기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지옥에 있는 것 같았고,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지금은 오직 콘서트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Q) 무엇이 당신에게 그렇게 큰 고통을 주었나요?
- 한국은 좁고 인구가 많아 경쟁이 치열합니다. 모두가 최고가 되려고 애쓰고, 때로는 이를 위해 남을 해하기도 합니다. 열일곱 살 무렵 제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부적절한 질투와 압박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인과 사업가들조차 얽혀 들었고, 그것은 저를 깊은 슬픔에 빠뜨렸습니다.

숲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그의 말은, 타인을 해치면서까지 더 위로 오르려는, 현실판 '오징어 게임'과도 같은 잔인한 경쟁, 예술조차도 단기적이고 상업적 성과로 재단하는 사회적 분위기,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재능과 명성을 세속적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던 정치인과 사업가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갈망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고국이 그립지 않다는 그의 말에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면서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으로서 그가 어린 나이에 이 땅에서 겪고 감내해야 했을 고통이 그려져 씁쓸한 공감이 갔다. 그리고 한때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이름을 날리며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한국 음악'산업'이 지닌 상업주의, 예술에 대한 존중과 보호 부재 속에서 스러져갔던 어느 연주가가 떠올랐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계속 이곳에 머물렀다면 그 연주가와 같은 상황에 빠지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재능 있는 이 젊은 피아니스트가 예술을 향한 그의 순수한 열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세상에 더 많은 아름다움을 전파해 주기를, 그를 아끼는 팬으로서 진심으로 바란다.




임윤찬의 인터뷰를 접하며 최근의 여러 일들이 떠올랐다.

'인서울' 대학에 가지 못하는 이들을 인생의 패배자로 여기는 학생들, 고생 끝에 (계층의) 사다리 위로 올라 서자 지난 일은 깡그리 잊고,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며 '나만 아니면 돼'라는 태도를 보이던 누군가가 생각났다.

최근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미국 시카고에 주방위군이 투입될 거라는 소식을 듣고 시카고 인근에 살고 있는 그에게 우려를 표하자, '나는 괜찮아. 내가 있는 곳은 부촌이라 안전하거든.'이라고 말하던 그가,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고 탄압하는 현 대통령에게 표를 주고서도, 그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보면서도, 일말의 책임 의식을 느끼기보다는, 경쟁을 뚫고 이 자리에 선 나는 안전하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되려 안도감을 내비칠 수 있는 것도, 결국은 타인을 위한 배려가 철저히 결여된 경쟁의식을 저도 모르게 내면화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나도 그런 의식을 품고 살아온 게 아닐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자원도 없는 이 좁은 국토에서 우리가 이만큼의 발전을 이룩한 것은 치열한 경쟁을 버텨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고, 우리는 이제 이만큼의 위치에 올라섰다. 그럼에도 우리를 갉아먹고, 심지어 생명마저 위태롭게 하는 경쟁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타인보다 시험 문제 하나라도 더 맞히고, 가지고, 타인을 이기고 올라서는 사람만이 자랑스러운 승자로서 대접받는 사회가 과연 건강하게 유지되고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을까, 좁은 어항 속 구피들처럼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고 먹히다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나서야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감을 떨쳐내기가 어렵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경쟁이란 어쩔 수 없이 초래되는 것일 테지만, 그럼에도 타인을 해치지 않는 최소한의 배려가 있는 경쟁이었으면 좋겠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같은 연주가들이 자유로이 예술적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사회이기를 바란다. 자신의 삶이 걸려있는 콩쿠르에서도 오로지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고자 최선을 다하고, 함께 연주하는 이들을 배려하던 파이니스트 임윤찬의 모습이 더욱 와닿는 요즘, 최근 개봉한 영화 '어쩔 수가 없다'속 이야기가 그저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판타지이기를 소망하게 되는 마음이야말로 정말,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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