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호통
'막내가 손가락이 길다고 피아노를 잘 칠 것 같다고 선생님이 그러시네요. 막내만 피아노 학원 좀 보내면 안 될까요?' 문 뒤에서 부모님의 대화를 엿듣던 나는, '피아노는 무슨 놈의 피아노야, 그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그래!" 아버지의 호통을 듣고는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딱히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엄마께 요청을 드린 적도 없었는데, 단칼에 거절하는 아버지의 호통이 한없이 서러웠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만큼 부자도 아니었고, 밥을 못 먹을 만큼 가난하지도 않았지만,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콩알만 한 월급은 여섯 식구에게 늘 부족함을 주었다. 청렴결백한 공무원 아버지가 사 남매를 4년제 대학에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이었을까? 아버지의 호통 속에
감춰진 속상함과 미안함을 어느덧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화목, 건강, 행복 대신 우리 집 가훈은 근검, 절약, 저축이었다. 세 개 모두 비슷한 뜻이니, 뭐 하나라도 바꾸자고 말씀드렸더니, '절약은 할수록 좋은 거다!'라시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너무 부끄러워 우리 집엔 가훈이 없다고 거짓말하고, 숙제를 제출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적당한 결핍은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열심히 사시는 부모님을 통해 부지런함을 배웠고, 검소함이 몸에 배었다. 어렸을 때는 소꿉놀이 세트 대신 조개껍데기와 돌이 그릇이 됐고, 자연스레 상상력과 창의성이 발달되었다. '이 상황을 개선시키고 싶다'는 내적 열망이 자극되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결핍을 경험하니,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고, 당연한 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선물을 받으면 기어코 가격을 알아내 값싼 선물이면 두고두고 욕을 하시는 어르신이 있다. 어럽게 자수성가하신 분인데, 모든 기준은 오로지 '돈'이다. 참으로 졸렬하고 한심해 보였다. 값싸고 작은 선물에 들어있는 고마운 마음을 읽어낼 여유는 없는 것이다. 결핍을 견디고 극복하다 보면 실패나 좌절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회복탄력성도 발달하게 된다.
가끔 나가는 동기 모임에서 성인 자녀에게 '엄마카드'를 마음대로 쓰게 해주고 있다는 친구들이 꽤 많아 적잖이 놀랐다. 지적했더니, '애 하난데 그 정도도 못해주냐'며, 자식에게 좀 베풀고 살라고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각자의 교육관은 다르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부모가 영원히 뒷바라지해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녀를 사랑한다면 물고기를 먹여주지 말고, 낚시하는 법을 가르처야 한다. 스스로 설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키워줘야 한다. 어차피 갖고 있는 재산은 유산으로 다 자식들한테 남겨진다. 그래도 젊은 시기,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체험시켜야 한다. 결핍을 스스로 극복했을 때 얻는 짜릿한 성취감을 맛보게 해야 한다.
결핍은 무조건 나쁜 게 아니다. 적당한 결핍이 의욕을 만든다. 모든 게 다 갖춰있다면 매일매일의 인생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단시간에 날리고, 오히려 전보다 더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결핍을 어떻게 마주하고,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따라 아이의 가치관, 목표, 회복력, 인간성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라. 어린 시절, 문 밖에서 서럽게 들었던 아버지의 호통은 깊은 가르침으로 내 인생에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