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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와 삶을 바꾸는 기질 심리학

마음의 모국어를 찾아서

by 뷰티펄

우연히 유튜브에서 한 영상을 보았다. 영상에서는 바이링구얼(두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에 대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영상의 주인공은 영화배우 최민수 씨의 아내 강주은 씨였다. 그녀는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한국어보다 영어가 훨씬 익숙한 사람이다. 인터뷰에서 한국어로 말할 때는 단어 선택과 문장을 이어가는 데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는 반면, 영어로 말할 때는 말투나 표정, 제스처까지 자연스럽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전문가처럼 변했다. 마치 두 사람을 보는 듯한 인상이었다. 그 장면을 보며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인간은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때, 가장 자연스럽고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


언어는 생각과 감정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기본 도구이기에 모국어는 타고난 정서적 기반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모국어는 개인의 정체성과 감정을 가장 원활하고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는 내면의 언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국어로 소통할 때 자신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언어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나는 기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사용하는 언어에 모국어가 있듯 마음에도 각자 ‘마음의 모국어’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마음의 모국어가 바로 기질이다.


기질은 그 사람을 형성하는 중요한 언어이자 사고와 감정, 행동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표현하듯 기질 역시 우리가 세상과 관계 맺고 반응하는 방식의 출발점이다. 기질은 세상을 해석하는 ‘마음의 문’이자 우리 ‘마음의 뿌리 언어’와 같다.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고, 감정을 해석하며, 관계를 형성할 때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적 언어가 바로 기질이다. 이처럼 기질은 우리의 반응과 감정, 관계를 결정짓는 마음의 기본 언어다. 그런데 이 기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강의 첫 시간에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한 생명이 자라는데, 씨앗과 토양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둘 다 중요할 것 같은데 이렇게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할 것 같은 질문을 하면 괜히 눈치를 보고 대답을 망설인다. 정답은 정말 둘 다 중요하다. 우리는 자라나는 식물처럼 타고난 기질(씨앗)과 자라온 환경(토양)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다.


나는 오랜 시간 농사를 지으면서 인간이 자라는 과정이 식물이 자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당근 씨앗을 심었다고 생각해 보자. 같은 종의 씨앗을 심었는데 자라고 보니 어떤 당근은 길쭉하고, 어떤 건 짧고 통통하다. 또 어떤 당근은 색이 선명하고, 어떤 건 빛이 바래 있다. 왜 그럴까? 같은 씨앗이라도 햇볕, 물, 흙의 질, 주변 식물과의 관계 등 환경이 달라지면 당근의 형태도 달라진다. 인간의 기질도 마찬가지다. 같은 기질을 타고났고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라 온 환경에 따라 성격과 행동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농사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일은 잡초 뽑기다. 생명은 알아서 자란다. 씨앗도, 햇살도, 비도 다 준비되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잡초를 뽑아 주지 않으면 좋은 기운이 자라지 못한다. 이 잡초는 사람의 마음에도 있다. 자기비판, 비교, 억눌린 감정, 왜곡된 신념, 상처받은 경험 등이 잡초와 같다. 타고난 좋은 기질이 있어도 자라나는 환경에 잡초와 같은 것들이 무성하면 그 사람의 자연스러운 감정 표현이나 본래의 반응이 억눌리게 된다. 결국 ‘나는 왜 이럴까?’라는 자책으로 연결될 수 있다.


20대 취업준비생 정희 씨는 자신을 지나치게 걱정하며 재촉하던 부모님으로 인해 힘들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근데 부모님은 ‘왜 이렇게 친구를 안 사귀고 소극적이냐?’며 자꾸 저를 걱정하셨어요. 부모님은 제가 싫다고 해도 스피치 학원에 보내고, 모임을 만들어서 리더를 시키고, 발표를 왜 안 하냐고 재촉하시고, 그럴 때마다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이상한 줄 알았고,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하지?’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니까 제 기질이었어요. 낯가림이 심하고 내향적인 편인데, 그걸 이해해 주기보다는 무조건 바꾸려고만 했던 거죠. 모든 사람이 적극적이고 발표를 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적응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고 편안해지면 이렇게 제 생각을 말할 수 있는데, 부모님

은 제가 다른 친구들보다 뒤처지고 부족할까 봐 불안하셨나 봐요.”


정희 씨처럼 자신이 어떤 씨앗인지도 모르고 부적절한 토양에 심긴 채 자란 경험은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이야기였다. 심리학자 브론펜브레너Urie Bronfenbrenner의 생태체계 이론은 이런 구조를 잘 설명해 준다. 그는 인간의 발달이 단지 개인의 특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친구, 또래, 학교, 사회, 문화와 같은 다층적 환경 체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형성된다고 보았다. 마치 식물이 햇빛과 물만이 아니라 주변 식물들, 흙의 질, 바람의 세기까지 영향을 받듯이 우리의 기질도 다양한 관계와 환경 속에서 길러지고 때로는 왜곡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나의 씨앗(기질)을 아는 것과 동시에 지금 내가 어떤 토양(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 그 기질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나와 내 삶을 이해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 된다. 기질을 알면 자신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고, 내가 어떤 상황에서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그 기질이 삶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다.


기질은 일상생활 곳곳에서 불쑥불쑥 얼굴을 내민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예기치 않게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설명할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이는 순간,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왜 나는 자꾸 이렇게 되는지 생각이 드는 순간 등 모든 순간에 기질은 조용히 작동하고 있다. 친구들과 함께 식당을 고를 때, 어떤 사람은 일단 평점을 보고 가자며 꼼꼼하게 후기를 찾고, 어떤 사람은 그냥 느낌 오는 데로 가자며 직감을 따르고, 또 다른 사람은 ‘혹시 줄을 서야 하면 어쩌지?’ 하며 미리 걱정부터 한다. 메뉴 하나를 고르는 데도 각자의 기질은 이미 나와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갑작스럽게 약속이 취소되면 내심 기뻐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어떤 사람은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만으로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기도 한다. 누군가는 새로운 환경에 금세 적응하며 에너지를 얻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낯선 상황에 쉽게 위축되고 피로감을 느낀다. 우리는 이런 순간들을 성격 차이 혹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MBTI 유형으로 넘기지만, 그 이면에는 타고난 기질이라는 깊은 층위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잘 의식하지 못한 채, ‘내가 예민해서 그렇다’, ‘나는 왜 이럴까?’ 하며 스스로 자책하거나 억누르기도 한다. 특히 성인이 되면 ‘성격’이라는 이름 아래 기질은 점점 더 가려진다. 사회적 역할, 책임, 경험, 학습된 태도들이 기질 위에 덧입혀지면서 본래의 나다운 반응과 감정은 점차 억눌리고 왜곡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질은 더욱 섬세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마치 숨겨진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처럼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성격 이면에 자리한 기질이라는 토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음의 모국어를 찾는 일은 자기이해와 진정한 자기 수용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기질을 이해하고, 그 기질이라는 내면의 언어를 통해 자신과 더 깊이 소통하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더 이해하고, 나다운 삶에 한 걸음 가까워질 수 있다. 당신만의 마음의 모국어인 기질을 찾아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 <관계와 삶을 바꾸는 기질 심리학(조연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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