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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 Jan 09. 2024

[책] 르포에 가까운 소설

정소현 <가해자들>

누군가 종일 쫓아다니며 머리를 자근자근 밟아다 걷어차는 느낌이었다. (16쪽)



읽지 않을 수 없는 소설이었다.


몇 달째, 나는 층간 소음으로 고통받고 있다. 초반에는 귀가 아팠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집에 있는 것이 고역이었고, 또 시간이 지나자 집은 지옥 같았고, 또 시간이 지나자 이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저 베란다 밖으로 뛰어내리면 해방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력했고, 심장이 아팠고, 머리가 아팠고, 소화가 되지 않았고,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분노는 1단계였다. 점점 삶에 대한 의지와 희망이 사라졌다. 층간 소음에 흉기를 들고 위층에 올라갔다는 뉴스 리포트를 왕왕 접하는데, 그게 정말 괜히 있는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런 와중에 '층간 소음'을 주제로 하는 소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전, 한 시간 만에 소설 전체를 읽었고, 나는 후회했다. 나는 피해자였다. 피해자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해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되었고, 도리어 미안한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 '내가 예민한가? 그런 나 때문에 저들에게 내가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걸까?'


제목이 '피해자들'이 아니라 <가해자들>인 점도 의미심장하다. "각자의 책임 소재와 응분의 복수들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확실하게 악랄한 가해자로 규정될 만한 이는 없었기에 마음은 더욱 복잡해진다.(143쪽)" 모두 피해자이나, 결론적으로는 모두가 가해자였다. 나도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지.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은 걸 후회한다. 나는 아직 공감과 위로가 필요하다. 내가 끼칠 수도 있는 잠재적인 해까지 고민하느라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가해자의 처지 따위, 아직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 마음은 너무 복잡해져 버렸다.


그나저나 세상이 참 이렇다. 오죽하면 층간 소음을 주제로 소설이 다 있을까. 작가님도 유경험자인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소음으로 괴로워하는 자의 심장을 푹 찌르는 그런 표현을 쓸 수 없었을 거다. 소설이라기보다는 르포에 가까운 소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일상을 되찾고 싶(88)"다.




나는 계속 견디는 중이었다.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라 견디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9)
나는 그 커다란 소리들이 우리를 두드려 패는 것 같았다. (61)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나는 성빈이가 울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조마조마한 기분이 들었다. (...)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몸이 반응하는 것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74)
어느 날 나는 성빈이의 들숨과 날숨 사이의 정적 가운데서 음악 소리를 희미하게 들었다. 사방이 아주 조용한 상태에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그 소리가 나에 대한 공격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 순간부터 가슴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 숨을 참고 귀를 기울여 결국 그 소리를 다시 찾아내곤 했다. 나는 그게 이상한 짓인 줄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반복하며 밤을 꼬박 새웠다. (77)
안 들리면 신경을 안 써버리면 되는데 제가 어느새 정신을 집중해서 소리를 찾고 있더라고요. (79)
저 노래가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었다. (83)
귀가 트이면 안 들리던 소리가 막 들린대요. (119)
소음, 진동 관리법이 있고 층간 소음을 조정해 주는 기관이 있지만, 갈등을 중재하고 권고할 뿐이지 법적으로 처벌하거나 제재하지는 못했다. 경범죄로 신고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지만, 피해자가 직접 피해를 입증하는 과정이 쉽지 않은 데다 그 배상 금액 또한 미미하여 화를 돋우기만 할 뿐, 해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간에 둘 중의 한 집이 떠나야 끝나게 되는 싸움이었다. (128)
사람들은 이 일이 누가 중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둘 중의 하나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한 번 트인 귀는 막히지 않고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으며 상한 마음과 망가진 관계는 고치기 힘들다. (137)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술가들은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소리들을 잡아내는 예민한 감각과 그 보통의 주파수와는 다른 소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동시에 지닌 뒤틀린 소음-기계에 가까울 것이다. (145)
가해자들이 아주 작은 주변의 소음에도 민감해진 것은 자신의 곁을 채워주는 가족의 소리와 주변 사람들의 따스한 울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147)
하지만 소음은 처음부터 "외로움이 만들어낸 실체도 없는 소리"였다는 점에서, 그 타인의 무분별한 진동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이 실은 타인이 없는 외로운 진공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목표는 애초에 모순된 방향을 향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149)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가해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상황이 무서워 그곳을 영영 떠났다.
(151쪽,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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