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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 Jun 14. 2024

[책]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니까

오지윤 <작고 기특한 불행>

불행한 이야기가 읽고 싶었다. 그래서 읽었다.


남의 불행한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나 말고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삼고 싶었다. 생각하니 새삼 작가님에게 미안한 동기다.


하지만 오지윤 작가<작고 기특한 불행>은 ‘불행’보다는 ‘소소’하고 ‘기특한’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나와 비슷한 면도, 다른 면도 있어 나의 면면을 한번쯤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나를 못돼 처먹은 인간이라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변명은 나중에 하겠다. 선생님이 전수해 준 문장 중 나의 안전 장치로 자리매김한 단 하나의 문장은 “실은, 사람들도 모두 불행해요”였다. 이때부터 나는 이 문장을 하루에 한 번쯤은 되뇌게 됐는데 스스로가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전설적인 요괴 따위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21쪽)


결국 책을 읽기 시작했던 목표는 달성했다. “실은, 사람들도 모두 불행해요.” 지금 나의 상태가 ‘아노말리’가 아니라 그냥 ‘노멀’이라는 걸 다시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할 계기가 필요했다. 그동안 (의학적 힘을 빌려) 조금 신이 나 있었나 보다. 아니, 신이 나 있었다기 보다는 나를 조금 더 관대하게 바라보는 세상에 마음이 해이해져 있었던 거지.


“땅바닥에 앉아 내 기분을 어떻게 달랠까 궁리했다. (…)
그러다 눈을 감고 두 명의 나를 그려 본다. 오지윤이 오지윤을 꽉 안아 주러 걸어오고 있다. 하나는 주저앉아 있고 다른 하나는 저기 멀리서 다가와 함께 무릎 꿇어 준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익숙해져야 해’라고 오지윤이 오지윤에게 말했다.” (88쪽)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상태가 드라마틱하게 개선되지는 않았지만, 잠시 잊고 있던 충고를 상기한다. 나의 가장 친하고 가까운 친구는 내 자신. 나를 달래주어야 할 건 다름아닌 나. 제일 관대해야 할 것도 다름아닌 나. 요즘은 너무 풀어주는 감이 없잖아 있기는 한데, 그래도 작가의 말처럼 “기어이 무언가를 저질러도, 인생은 크게 잘못되지 않”으니까. “크게 잘못되기에 우리가 너무 작은 존재”니까.



나를 못돼 처먹은 인간이라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변명은 나중에 하겠다. 선생님이 전수해 준 문장 중 나의 안전 장치로 자리매김한 단 하나의 문장은 “실은, 사람들도 모두 불행해요”였다. 이때부터 나는 이 문장을 하루에 한 번쯤은 되뇌게 됐는데 스스로가 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전설적인 요괴 따위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21)


“시간이 빨리 간다는 건 네가 잘 살고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다.”
(…)
아빠가 문득 말주머니 하나를 더 보냈다.
“시간이 너무 안 가서 힘든 사람도 있단다.”
말주머니를 한참 쳐다보는데 글자 사이사이로 서서히 아빠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두운 거실, 고파에 앉아 느릿느릿 카톡을 치는 아빠. 그 옆에는 강아지가 잠들어 있고 아빠는 트로트 프로그램을 켜 놓고 있다. 내가 독립을 하고 싶은 이유였을 만큼 커다란 TV 소리.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는 아침이 어색했던 날도, TV를 보고 또 봐도 해가 지지 않는 날도 있었곘지. 은퇴한 아빠의 하루는 그렇게 끝이 없을 것 같다가도 갑자기 저물어 버릴 것이다. (29)


누군가 내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물어본다면 ‘부모가 신나서 내 사진을 찍어 줄 때의 기분’이라고 이야기하겠다. (34)


욕망은 포장하지 않으면 비린내가 난다. 그리고 비린내가 나는 것들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53)


내가 제거한 오답들이 모여 사는 반대편 우주가 있다고 믿는다. 그곳에서 나는 헤어진 그와 계속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성실하게 일한다. 그곳의 나는 글을 쓰겠다고 새벽에 잠들지 않는다. 쓸데없는 고민을 물리치고 깨끗한 채소를 즐겨 먹으며 건강하게 살아간다. 뭐 하나 결정한다고 ‘우주’까지 논하는 나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서른셋의 나이에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느라 ‘죽음’까지 끌어들이는 나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어쩌면 ‘반대편 우주’에 진짜 내가 사는 것은 아닐까. 나의 총은 애꿎은 정답만 겨누고 나는 바보같이 오답의 우주만 가꾸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겠지만 오답을 택하며 사는 게 이쪽 우주의 역할이라면 나는 열심히 주어진 오답을 살아낼 테다. 반대편의 나도 잘 살아 주길. (58~60)


칭찬에 으쓱하는 재수 없는 사람이 되지도 않고 칭찬을 못 받아들이는 답답한 사람이 되지도 않을 수 있는 한마디. 그것은 “역시, 안목이 높으시네요”라고 말하는 거다. 쑥스러워하지 않고 의심하지도 않고 그 사람에게 칭찬을 되돌려 주면 되는 것이다. (63)


이제 사과 하나를 먹어도 예쁜 접시에 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러길 바라듯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사랑하길 바라듯이. (64)


역사에 이름이 남는 예술가들의 첫 번째 조건은 세상에 스스로를 내보이는데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거다. ‘나대지 않는자’가 이름을 남길 수는 없다. (79)


우리네 삶에는 우리의 자존감을 겨냥한 스나이퍼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들을 피해 무균실에서 살아갈 수는 없으니, 우리는 빵꾸 난 자아에 새살이 돋게 해 줄 브랜드에 가끔씩 돈을 쓰며 살아간다. (…)
사랑은 결국 내 자존감이 차오르는 느낌에서 시작된다. (86)


“You are the butter to my bread.”
(…) 노릇한 빵은 있는 그대로도 맛있지만 버터를 바르면 풍미가 달라진다. ‘당신이 있어도 없어도 난 있는 그대로 멋진 사람이에요. 물론, 당신이 더해지면 또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나는 승연이의 문장을 이렇게 읽었다. 승연이는 그 자체로 노릇노릇한 인생을 살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또 다른 맛이 나겠지. (107)


집안일이 단순히 더러움을 해결하는 일은 아니다. 거실 바닥에 밟히는 머리카락들은 ‘내 육체에서 이탈한 것들’이다. 곳곳에 숨어 있는 먼지도, 쓰레기도 모두 내가 만든 것이다. 내 몸에서 이탈한 무언가와 내가 만든 쓰레기들. 온전히 내가 살아간 결과물이다. 집이라는 공간이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내가 만든 오물을 내 손으로 치우는 행위. 그게 집안일이다. 내가 저지른 것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지는 가장 ‘어른스러운’ 일이다. (140)


알고리즘은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내버려 두는 부모 같다. 내가 먹고 싶고 잘 먹는 것만 계속 주면서, 나를 살찌우는 부모다. 그렇게 전 세계 모든 인구가 알고리즘이 먹여 주는 ‘취향’을 먹으며 고립된 각자의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171)


나의 인생은 ‘기어이’가 많아질수록 풍성해질 거라 믿는다. 기어이 무언가를 저질러도, 인생은 크게 잘못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 버렸다. 크게 잘못되기에는 우리가 너무 작은 존재다. 나는 이 단어에 왜 이리 끌리는 걸까. 나는 언제나 부재한 것을 욕망하는 사람. 오늘도 ‘기어이’의 변곡점을 기다린다.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자. 그 순간이 되면 모든 건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221)


내 몸은 내가 평생 세 들어 살아야 하는 나의 집이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라는 문장을 내 몸의 가훈으로 삼기로 했다. 몸속에 사는 작은 친구들(미생물, 호르몬, 신경계 등)이 모두 열심히 가훈을 따라 주길 바란다. (…)
내 몸에 사는 친구들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나는 매일 노력할 생각이다. 거창한 노력은 아니다. 쾌락과 안녕감과 배부름과 호기심과 낄낄거림이 계속되면 그게 행복이니까. ‘쾌감’이라는 단어가 고상한 드레스를 입으면 ‘행복’이 되는 것뿐이다.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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