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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 안 했어?

by 지호

원이가 입원한 지도 45일 정도가 지났다.


간혹 가다 떠오르는 중환자실 입원비 걱정에, 이 정도면 괜찮아 보이는데 퇴원해도 되는 것 아닌가? 하긴, 아직 안 났으니까 퇴원을 안 시켜주는 거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여러 잡생각을 떨치고 집에 가려고 보니 오늘따라 유독 내가 가는 걸 알고 풀 죽어 보이는 원이를 두고 찝찝해서 떠나기 싫은 맘도 든다. 45일 동안 병원에서만 심심했을 텐데. 너는 참 심심하겠다~언니가 또 올게. 하며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주말에 원이를 보고 서울에 올라가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나에게도 평범한 일상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가 사는 동네까지 놀러 왔다. 저녁 느직하게 한 시간 반을 달려 우리 동네까지 놀러 온 친구는 내 방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스무 살 적 대학 시절에 만난 친구는 내가 혼자 서울에서 기숙사. 하숙집, 친척집, 원룸 등 여러 군데 집을 옮길 때마다 한 번씩은 와서 자고 갔다. 그러는 동안 친구는 부모님과 계속 함께 살았었는데, 이제 곧 결혼을 앞둔다는 말을 듣고 나선 들을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만나면 맛있는 거 먹고 남자 친구 얘기하고 웃느라 바빴는데, 요즘의 나는 몸이 아픈 동생을 빼고는 할 얘기가 없을 만큼 일상이 전부 원이 생각뿐이다. 오늘은 꼭 말해야지.


매번 다르다고 말하는 둘째와 나는 정말 달라서, 원이가 입원한 첫날부터 동생은 회사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친구들에게 울며불며 전화를 돌리고, 충대 병원에서 일하는 초등 동창에서부터 사돈의 팔촌까지 다 알릴 기세로 전화통을 붙들고 돌아다녔다. 반면 내 친구들은 내가 셋째 동생이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배려 있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굳이 캐묻진 않으니까.



성격 차이도 있겠지만 장애인 가족이 있다는 건,


장애를 가진 형제가 있다는 걸 나는 성인이 되고도 한참 후에 내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야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주변을 돌아봐도 보이지 않을 뿐 장애인과 장애인 가정은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초등학교 때 공항에서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어느 가족이 원이를 쳐다보며 “어? 장애인이다.”라고 얘기한 장면이 나에겐 가족 내에서 원이를 인지하게 된 첫 번째 기억이다.


10대 때, 부모님이 나에게 동생이 왜 아픈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20대 때,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30대 때, 나의 모든 선택에 동생이 영향을 미친다는 걸 미리 알 수 있었더라면 좀 더 일찍 원이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부모님도 하루하루 새로운 환경에 대응하느라 미처 건강한 자식에게 어떻게 말해줄지 생각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원이에게는 미안하다. 너의 언니라고 말 못 한 것에 대해서..






저녁을 먹고 집 앞 카페에서 동생에 대해 말하는 나에게 친구는 “왜 말 안 했어? 힘들었겠다...” 하며 글썽였다.


“나는 왜 눈물이 나지?”


내 말을 듣고 눈물 흘리는 상대방을 보는 느낌은 내 방어막이 허물어 지는 것과도 같았다.


“너랑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친구의 말을 들은 나는 이제껏 꼭꼭 잘 숨긴 나에게 놀랐다. 나는 가까운 만큼 표현을 못했나 봐.




-

“와, 역대 급이다!”


고시원도 원룸도 아닌 대궐 같은 퀸 사이즈 침대가 있는 내 방에 입성한 친구는 내 자취방 역사상 최대 사이즈에 놀란 소감을 밝혔다.


친구는 내 방에 있는 원이의 사진을 보고 또 놀랐다. 맨날 싸우는 둘째랑 다르네? 동생을 이렇게 좋아했어?




0.5평짜리 좁은 하숙집 방에서도 둥글게 몸을 말고 같이 잤던 친구와 이제야 가까워 졌다고 느낀 건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 방안에서 조용히 떠들다가 한 사람이 ‘남자 친구 때문에 교환학생 가는 걸 포기했다.’ 고 고백하자 서로 배꼽 빠지게 웃던 때, 나도 이 친구에게 한두 가지 비밀을 고백할 생각을 못했다. 그래서인지 원이가 아프고 나서야 나는 오랜 시간 동안 풀지 못한 과제를 해낸 느낌이다.


“나는 원이의 언니라고 말하기. 원이가 내 동생이라고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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