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마음도 받아줄 수 없다
우리부부는 아이들과 시어머님, 아가씨와 남자친구까지 다 함께 동남아 여행을 다녀왔다.
올해 초부터 날짜를 대략 잡아 놓고 여름부터 항공권 특가를 노리면서 나름 반 년전부터 준비한 여행이었다. 부동산 관련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여러 선택의 기로에서 머리를 싸매며 한창 매몰되어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져 가던 와중에 떠나게 되었다. 막판 며칠은 남편과 둘이 정말 가서 누워만 있자고 다짐하면서, 그 한가로운 모습으로 우리를 위로하며 버텼다. 짐 싸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어찌저찌 떠나는 날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돌아오는 비행기편 날짜가...이게 맞나요?
수속을 밟는데 직원의 말을 듣고 너무도 당당히 다시 확인해달라며 돌아오는 항공권을 내밀었지만, 잘못 안 것은 나였다. 돌아오는 날짜와 일자만 같고 달은 3개월 전인 항공편을 예약했던 것이다... 순간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따질 새도 없이 수속을 마저 밟기 위해 돌아오는 편을 정신없이 검색해서 결제했다. 그 와중에 웃긴 건, 여름 내 그토록 찾아 헤맨 특가 항공권보다 당일에 급하게 예약한 항공권 값이 더 쌌다는 것...물론 당시에는 전혀 웃기지 않았지만. 이제는 거의 쿠팡 결제하듯이 항공권을 구매하는 나에게 감탄하는 남편을 뒤로 하고 나는 사정 없이 위축되고 있었다. 이 말도 안되는 실수를 저지른 나에 대해서. 그런 나에게 일을 수습하는 동안 한 편에서 아이 둘을 보고 계시던 어머님이 이 일을 들으시고 하시는 말,
지금까지 표를 한 번도 확인 안했니?
황당한 마음에 충분히 하실 수 있는 그 한마디가 어찌나 비수같이 들리던지. 머리로는 나 같아도 그런 말 할 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작아진 마음은 너무도 상해버렸다. 이 후로 이제 항공권 일은 잊어버리라는 어머님의 말씀조차 고깝게 들릴만큼. 문제는 이 상한 마음의 여운이 여행 내내 가시처럼 수시로 나를 찌르곤 했다는 것이다. 어머님이랑 최대한 부대끼고 싶지 않을만큼 불편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동시에 그런 마음을 남편이나 아가씨 등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까 전전긍긍 긴장하며 보냈다. 실제로는 그와 관련해서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남편의 입에서
왜 그렇게 엄마한테 싸가지 없게 굴어?
라는 말이 들리는 듯 했다. 어쩌다 비어져 나오는 마음이 정색으로 굳어지는 걸 느낄 때면 더더욱 그랬다. 여행 떠나기 전의 어지러운 현실적인 문제들로부터는 거리가 생겼지만, 나는 또 다른 마음의 지옥에 갇히게 되었다. 스스로가 좋은 분인 어머님을 다짜고짜 싫어하는 미성숙하고 나쁜 사람으로 여겨져 어떻게든 이 마음의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그럴 수록 더욱 트집잡으려는 것처럼 느껴져 나 자신이 참 볼품 없게 느껴질 뿐이었지만.
이 모든 마음은 다 알아차렸는데, 오늘 상담에 가니 상담 선생님이 하시는 말,
그런 상태일 때 내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뭔가요?
그 말에는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내 안에 귀 기울이는 레이더를 꺼 놓고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님, 남편, 아가씨를 향하는 가상의 외부 레이더는 너무 민감하게 켜 두어서 하지도 않은 말을 듣는 지경이었으면서. 아마도 사실은 다 나에게 하는 말이었겠지. 괜히 어머님한테 싸가지 없게 군다는 말도, 대체 왜 어머님을 그렇게 불편해하냐는 말도, 이유가 뭐냐고 따져 묻는 말도, 항공권 한 번 제대로 체크 안했냐는 말조차도.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한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나에게 선생님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그 화난 마음에 대해 상대방이 '화날 수 있지.' 라는 눈빛을 보내준다면 어떨 것 같나요?
...대답 대신 느닷없이 눈물이 나왔다. 나는 그저 내 마음에 대한 긍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옳다 그르다, 이유가 합당하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럴 수 있지.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마음. 그 마음을 조금 더 느껴보라는 말에 그러려고 애쓰는데 발목을 잡는 어젯 밤의 일. 여행 다녀와서 오랜만에 어린이집에 갔다가 하원하는 길에 뭔지 말도 잘 안해주고 연거푸 툴툴거리며 짜증내는 아들에게 '대체 왜 그렇게 짜증이냐'며 고작 한 두번 참고는 같이 짜증을 터뜨렸던 내 모습. '잘 모르겠지만 너가 그런 마음이라면 이유가 있겠지' 와는 거리가 아주 먼 태도. 나의 어떤 마음을 제대로 봐주지 않고, 부끄러워 하고, 비난했던 그 태도가 아이들의 마음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나로서 뭔가를 느낄 때 또 죄책감으로 가려는 걸 발견하고 다시 그냥 느껴보려 애썼다. 그래야, 그 슬픔을 알아야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안 그럴 수 있으니까.
스스로가 실수하고 잘못했을 때, 그래서 마음이 작아지면 상대방이 내 반대편에 서서 나를 비난한다/할거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내 적의 위치에 서 있다고 보는 것 같아요. 실제로는 남편도, 어머님도, 아가씨도 내 옆에 있어요. 그걸 의식적으로 알아주면 좋을 것 같아요.
모두가 실은 내 옆에 있다는 걸 머릿속으로 그려만 봐도 눈물이 났다. 그게 사실이었다. 여행 마지막에 '네가 여행 준비부터 여행 내내 우리 챙기느라 애썼다는 거 다 알고 있다. 정말 고맙다.'라고 해주셨고, 귀국하려고 간 공항에 도착해서야 숙소 서랍에 두고 온 여권들이 생각나 부리나케 택시를 다시 잡아타고 돌아온 나에게 '얼마나 놀랐냐'고 마음을 헤아려주신 어머님은 결코 내 반대편에 서 있는 적이 아니셨다. 이미 내가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 같아서 거기에 더 뭐라고 할 수 없었다고 나보다 더 내 상태를 잘 알아봐 준 남편 역시도 내 적은 아니었다. 내 마음들은 누르려 할 수록 더 미성숙하고 통제 안 된 상태로 비어져 나왔고,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내가 부끄러워 들킬까봐 긴장하는 악순환 속에서 나는 그 모든 목소리가 내 안에서 나온다는 걸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어떤 마음도 잘못된 건 없다는 것, 너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럴 수 있다는 말에 진심을 담아 나에게 아이에게 전하고 싶다. 여행 가서도 편안하기는커녕 한 편으로는 여전히 시끄럽고 불편하고 짜증이 불쑥불쑥 났던 그 상태를 조금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던, 오늘의 상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