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말은 나의 거울이 된다
아이들 하원할 때는 항상 간식을 싸서 가곤 한다.
엄마를 다시 만나는 반가움 못지 않게 오늘의 간식은 뭘까 설레여 하는 얼굴이 귀엽기도 하고, 간식을 따로 싸가지 않으면 나오는 문 바로 맞은 편에 있는 무인간식가게로 거의 끌려가듯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 날의 간식은 컵파인애플이었다.
급작스러운 더위와 높은 습도가 시너지를 내는 날씨여서 컵파인애플은 집에 가서 먹자고 달래며 길을 걷고 있었다. 놀이터를 무심코 지나가다 엄마와 놀고 있던 친구를 발견해서 발걸음을 돌려 함께 놀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저녁을 먹은 후였고, 친구는 곧 저녁을 먹으러 들어가야 하는 상황.
갑자기 아들이 엄마 가방에 있는 컵파인애플을 먹고 싶다며 조른다.
마음 같아서는 냉큼 꺼내주고 싶었지만 아이들 친구가 마음에 걸렸다.
아이가 먹으면 친구도 먹고 싶을 거고, 친구 줄 것도 있지만 이걸 먹으면 저녁을 잘 먹기가 어려울텐데...
고민 끝에 조금만 놀다 집에 가서 먹자고 달랬다.
잘 설득하면 받아들일줄 알았는데, 많이 먹고 싶었는지 마음이 꽤 상해버린 아들.
아이들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익고 땀으로 티가 젖어가는게 보여 두 엄마는 열심히 3명의 아이들을 설득해서 헤어져 집으로 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들이 하는 말.
나라면 아까 컵파인애플 줬을거예요.
순간, 당황해서 아까 했던 말을 또 하며 나름의 이유를 허둥지둥 꺼냈다.
아들의 말이 곱씹을수록 마음에 남았다.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자신보다 친구를 더 우선으로 하는 것처럼 느껴져 속상하고 원망스러웠던걸까...
그 마음을 떠올려보다 자연스레 내 어린시절 기억으로 이어졌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내 친구도 아닌 1살 어린 이웃 동생의 생일파티에 강제로 초대되어 간 적이 있었다. 엄마들끼리 친했던터라 그 집 엄마가 생일 음식들 먹일테니 나를 올려보내라고 했었던 것 같다.
별 생각 없이 갔는데, 막상 가보니 거실에서 생일파티가 열리고 있었고 나는 부엌에 혼자 오도카니 앉아 짜장면을 먹게 되었다. 등 뒤로는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혼자 먹고 있자니 여러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관계와 분위기에 민감한 아이였고, 그런 아이에게 혼자만 빠져 있는 생일파티 분위기는 뻘쭘함, 민망함..무엇보다 소외감이 크게 느껴져 너무 불편하고 힘들었다. 물론 당시에는 어떤 마음인지도 모른 채 그 집 아주머니에게 별다른 말도 없이 뛰쳐나와 집으로 내려와버렸다.
화장실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엄마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고, 아주머니께 자초지종을 듣고는 나를 혼내며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억울했던 나는 반성문이 아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썼고,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화가 난 엄마에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건 어린시절의 기억이 많지 않은데 정말 몇 안되는 기억 중 하나다.
우리 아들의 말을 빌려 그 때의 나로서 얘기한다면,
나라면 행동에 대해서는 바로잡아주더라도 왜 그랬는지는 알아줬을거예요.
엄마의 일차적인 당황스러움은 이해가 간다. 맛있는거 먹고 오라고 올려보낸 애가 말도 없이 뛰쳐내려왔으니. 다만 내가 나름 열심히 내 행동의 배경을 알리려 한 시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은건 한 켠에 억울함으로 자리잡았다. 아마 엄마에겐 그렇게 한 이유가 뭐였든 '그 아주머니에게 예의가 없었다'는 게 조금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부모가 되고 나서 느끼는 건, 내 아이의 '예의 없음'은 평가의 시선을 부모에게 돌리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엄마도 그 시선이 먼저 의식되고 불안했을까. 정확히 확인할 길은 없지만 지금의 나 역시도 그 시선에 절대로 자유롭지 못한 엄마라는 건 안다.
내 아이의 요청을 들어주는 일이 다른 엄마와 아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여겨질 때 나는 아이의 요청을 거절하는 쪽을 택하는 엄마인 것이다. 물론 이건 꼭 엄마가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아이를 위해 얼마간 필요한 연습이기도 하다. 다만 컵파인애플 에피소드처럼 때론 다른 집에 양해를 구하고 아이의 요청을 들어주어도 큰 무리가 되지 않을 때조차 상대방의 불편함을 아이의 간절함보다 크게 의식할 위험이 있다. 아이의 말은 나에게 그걸 알려주는 듯 했다.
아이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과 별개로 그 마음을 알아줬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엄마만큼은 '나'를 우선으로 생각해주길 바라는 아이에게.
배고프고 목마른데 엄마가 그것보다 친구를 더 생각하는 것 같아서 속상했겠다. 근데 엄마는 어떤 선택을 하든 너가 가장 우선이야. 그걸 우리 아들이 잘 느끼게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불편은 주지 않도록 하는 법을 엄마도 고민해볼게.
앞으로도 아이에게 내가 겪은 서운함을 안겨주지 않을 자신은 없다. 순간순간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 휘둘리는 건 아이 없을 때에도 있었던 부분이니. 다만 그런 순간에 잠시 멈춰 생각해보고 싶다. 지금 이 선택이 내 불안과 불편을 해결하려는 건지, 아이를 우선으로 두는 건지를.
아이의 따끔한 한 마디가 나의 거울이 되어준다.
주로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비춰주곤 하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들여다봐야지.